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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용래 시인 / 저물녘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2.

박용래 시인 / 저물녘

 

 

지렁이 울음에

 

비스듬 문살에

 

반딧불 달자.

 

추풍령(秋風嶺) 넘는

 

아랫녘 체장수

 

쳇바퀴에도 달자,

 

가을 듣는

 

당나귀 갈기에도.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박용래 시인 / 점 하나

 

 

꿈꾸는

아가 눈 밑에 깨알

점 하나

잠자는

아빠 눈 밑에 깨알

점 하나

샘가,

확독에

백년이 흘러

섬돌에 맨드라미

피는 날

맨드라미 꽃판에

깨알점

한 됫박

 

눈물받이 눈물점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박용래 시인 / 접분(接分)

 

 

청(靑)참외

속살과 속살의

아삼한 접분(接分)

그 가슴

동저고릿 바람으로

붉은 산(山)

오내리며

돌밭에

피던 아지랭이

상투잡이

머슴들

오오, 이제는

배나무

빈 가지에

걸리는 기러기.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박용래 시인 / 제비꽃

 

 

부리 바알간 장 속의 새, 동트면 환상의 베틀 올라 금사(金絲), 은사(銀絲) 올올이 비단올만 뽑아냈지요, 오묘한 오묘한 가락으로.

 

난데없이 하루는 잉앗대는 동강, 깃털은 잉앗줄 부챗살에 튕겨 흩어지고 흩어지고, 천길 벼랑에 떨어지고, 영롱한 달빛도 다시 횃대에 걸리지 않았지요.

 

달밤의 생쥐,  허청바닥 찍찍 담벼락 긋더니, 포도나무 뿌리로 치닫더니, 자주 비누쪽 없어지더니.

 

아, 오늘은 대나뭇살 새장 걷힌 자리, 흰 제비꽃 놓였습니다.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박용래 시인 / 제비꽃 2

 

 

수숫대 앙상한 육․이오의 하늘. 어쩌다 남루(襤褸)를 걸치고 내 먹이 위해, 반라(半裸)의 거리 변두리에 주둔한 미군부대의 차단한 병동(病棟), 한낱 사역부로 있을 때. 하루는 저물녘 동부전선에선가 후송해 온 나어린 이국병사(異國兵士). 그의 얄팍한 수첩(手帖) 갈피에서 본, 접힌 나비 모양의 꽃이파리 한 잎. 수줍은 듯 살포시 펼쳐보이든 떨리던 손의 꽃이파리 한 잎. 어쩌면 따를 가르는 포화 속에서도 그가 그린 건 한 점 풀꽃였던가. 어쩌면 자욱히 화약 냄새 걷히는 황토밭에서 문득 누이를 보았는가. 한 포기 제비꽃에 어린 날의 추억도. 흡사 하늘이 하나이듯. 그날의 차단한 병동(病棟), 흐릿한 야전침대 머리의 한 줄기 불빛, 연보라의 미소(微笑).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박용래 [朴龍來, 1925.8.14~1980.11.21] 시인

1925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강경 상업고등학교 졸업. 1955년 《현대문학》에 시 〈가을의 노래〉외 2편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으로 『싸락눈』(1969), 『강아지풀』(1975), 『백발의 꽃대중』(1980) 등과 시전집 『먼바다』(1984)가 있음. 1961년 제5회 충남문학상과 1969년 시집 『싸락눈』으로 [현대시학] 제정 제1회 작품상과 1980년 제7회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