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 시인 / 신년기원
몸 되어 사는 동안 시간을 거스를 아무도 우리에겐 없사오니, 새로운 날의 흐름 속에도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희망―당신의 은총을 깊이깊이 간직하게 하소서.
육체는 낡아지나 마음으로 새로웁고 시간은 흘러가도 목적으로 새로워지나이다! 목숨의 바다―당신의 넓은 품에 닿아 안기우기까지 오는 해도 줄기줄기 흐르게 하소서.
이 흐름의 노래 속에 빛나는 제목의 큰 북소리 산천에 울려 퍼지게 하소서!
한 쪽의 빵을 얻기 위하여 한 세기의 희망이 굶주리던 지난 일년 한 이파리 꽃술에 입맞추기 위하여 한 세대의 젊음이 시들어버린
지난 일년의 얼굴 없는 물웅덩이 속에 1972년의 쉬임 없는 시간들이 고이어 고이어 끝 모를 심연을 우리의 눈망울에 잠기게 마옵소서.
검은 땅에 입맞추는 저 임자년(壬子年)의 첫 입술―새벽의 붉은 태양을 희망과 사랑의 눈빛으로 다만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를 오히려 도리어 더욱 슬프고 배고프고 목마르게 만들던, 단추로 눌러버린 이 기쁨들 빛의 이 영화(榮華)들 엉겅퀴 우거진 이 욕망의 벌을 지나, 낡은 경험 위에 새로운 슬기를 띄우며 새 아침의 도소주(屠蘇酒)를 마음의 새 푸대에 부으며, 아침 태양이 반짝이는 강물처럼 굽이쳐 굽이쳐 우리의 새로운 시간들을 당신의 품―당신의 영원한 바다로 흘러가게 하소서 하소서.
마지막 지상에서, 창작과비평사, 1975
김현승 시인 / 신설(新雪)
시인들이 노래한 일월의 어느 언어보다도 영하 5도가 더 차고 깨끗하다.
메아리도 한 마정이나 더 멀리 흐르는 듯……
정원의 썰매들이여, 감초인 마음들을 미지의 산란한 언어들을 가장 선명한 음향으로 번역하여 주는 출발의 긴 기적들이여, 잠든 삼림들을
이 맑은 공기 속에 더욱 빨리 일깨우라!
무엇이 슬프랴, 무엇이 황량하랴, 역사들 썩어 가슴에 흙을 쌓으면 희망은 묻혀 새로운 종자가 되는 지금은 수목들의 체온도 뿌리에서 뿌리로 흐른다.
피로 멍든 땅, 상처 깊은 가슴들에 사랑과 눈물과 스미는 햇빛으로 덮은 너의 하얀 축복의 손이 걷히는 날
우리들의 산하여 더 푸르고 더욱 요원하라!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 1963
김현승 시인 / 십이월(十二月)
잔디도 시들고 별들도 숨으면, 12월은 먼 곳 창들이 유난히도 다스운 달……
꽃다운 숯불들 가슴마다 사위어 사위어, 12월은 보내는 술들이 갑절이나 많은 달……
저무는 해 저무는 달, 흐르는 시간의 고향을 보내고, 12월은 언제나 흐린 저녁 종점에서 만나는 그것은 겸허하고 서글픈 중년……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 1963
김현승 시인 / 아침
새벽의 보드러운 촉감이 이슬 어린 창문을 두드린다. 아우야 남향의 침실문을 열어제치라. 어젯밤 자리에 누워 헤이던 별은 사라지고 선명한 물결 위에 아폴로의 이마는 찬란한 반원을 그렸다.
꿈을 꾸는 두 형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얼싸안고 바라보는 푸른 해변은 어여쁘구나. 배를 쑥 내민 욕심 많은 풍선이 지나가고 하늘의 젊은 퓨리탄―동방의 새 아기를 보려고 떠난 저 구름들이 바다 건너 푸른 섬에서 황혼의 상복을 벗어 버리고 순례의 흰옷을 훨훨 날리며 푸른 수평선을 넘어올 때 어느덧 물새들이 일어나 먼 섬에까지 경주를 시작하노라.
아우야 얼마나 훌륭한 아침이냐. 우리들의 꿈보다는 더 아름다운 아침이 아니냐. 어서 바다를 향하여 기운찬 돌을 던져라. 우리들이 저 푸른 해안으로 뛰어갈 아침이란다.
조선중앙일보, 193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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