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시인 / 망향
언제든 가리라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아이들이 한울타리 따는 길머리론 계림사(鷄林寺) 가는 달구지가 조을고 지나가고 대낮에 잔나비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굴레산(山)에 올라 무룻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뻑국채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곰취 참두릅 개두릅을 뜯던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년들은 금방맹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길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講道)상을 치며 설교하던 촌(村) 그 마을이 문득 그리워 아라비아서 온 반마(斑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모밀꽃이 하이얗게 피는 곳 조밥과 수수엿이 맛있는 고을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 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소원이더니 차를 타 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叢]에서 찔레순을 꺾다 나면 꿈이었다
창변, 매일신보사, 1945
노천명 시인 / 박쥐
기인 담 밑에 옹송그리고 누워 있는 집 없는 아이들 바람이 소스라치게 기어들 때마다 강아지처럼 웅웅대며 서로의 체온을 의지한다.
박쥐의 날개를 얼리는 밤― 청동화롯가엔 두 모녀의 이야기가 찬 재를 모으며 흩으며 잠들 줄 모른다 아들의 굳게 다문 입술이 떨리며 눈물을 삼키고 떠나던 밤―그 밤의 광경이 어머니의 가슴엔 아프게 새겨졌다
해가 바뀌는 밤 늙은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눈물짓다 젊은이가 떠난 뒤 이런 밤이 세번째
같은 하늘 낯선 땅 한구석에선 조국을 원망하나 미워하지 못하는 정(情)의 칼에 어여지는 아픈 가슴이 있으리……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 시인 / 봄의 서곡
누가 오는데 이처럼들 부산스러운가요 목수는 널판지를 재며 콧노래를 부르고 하나같이 가로수들은 초록빛 새옷들을 받아들었습니다 선량한 친구들이 거리로 거리로 쏟아집니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더 야단입니까 나는 포도(鋪道)에서 현기증이 납니다 삼월의 햇볕 아래 모든 이지러졌던 것들이 솟아오릅니다 보리는 그 윤나는 머리를 풀어 헤쳤습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붙잡고 속삭입나다 어디서 종다리 한 놈 포루루 떠오르지 않나요 꺼어먼 살구남기에 곧 올연한 분홍 `베일'이 씌워질까 봅니다
사슴의 노래, 한림사,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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