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김현승 시인 / 이 어둠이 내게 와서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5.

김현승 시인 / 이 어둠이 내게 와서

 

 

이 어둠이 내게 와서

요나의 고기 속에

나를 가둔다.

새 아침 낯선 눈부신 땅에

나를 배앝으려고,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나의 눈을 가리운다.

지금껏 보이지 않던 곳을

더 멀리 보게 하려고,

들리지 않던 소리를

더 멀리 듣게 하려고.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더 깊고 부드러운 품안으로

나를 안아 준다.

이 품속에서 나의 말은

더 달콤한 숨소리로 변하고

나의 사랑은 더 두근거리는

허파가 된다.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밝음으론 밝음으론 볼 수 없던

나의 눈을 비로소 뜨게 한다!

 

마치 까아만 비로도 방석 안에서

차갑게 반짝이는 이국의 보석처럼,

마치 고요한 바다 진흙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진주처럼……

 

마지막 지상에서, 창작과비평사, 1975

 

 


 

 

김현승 시인 / 이별의 곡(曲)

 

 

등불을 남기고 돌아가는 것은

오래 전부터 이 거리의 미풍이다.

 

안개는 자욱이 잠든 밤 위에 쇠를 잠그다.

 

멀리 바라보면 이층집이 서고

자욱한 포도로 넘어오는 만도의 초상들―

호! 밤은 이리도 슬픈 것인가?

빙산은 화려한 심장을 깨뜨리다.

 

나의 슬픔을 층층계의 중간에서

쓸쓸한 건강을 발견한 것뿐 아니란다.

눈과 제복의 고향에 우는 나아중 기적

안개는 버터빛으로 흐르고

등불은 차거운 심야를 동그랗게 파다.

 

떨어진 샤쓰 속에 지혜를 얻으련다……

잘 있어라. 젊은 제복의 코사크

이 밤은 장미도 만찬도 없이 그대를 떠나다!

아아, 마음은 멀리 사막의 지도를 펴 들고

매아미 허물같이 외로워 외로워……

흐를 참이다!

그대는 젊고, 저는 어리고

희망은 저보다도 어리기는 하지만……

 

숭전, 1936. 3

 

 


 

 

김현승 시인 / 인간은 고독하다

 

 

나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책을 덮게 한

최후의 지혜여,

인간은 고독하다!

 

우리들의 꿈과 사랑과

모든 광채 있는 것들의 열량을 흡수하여 버리는

최후의 언어여,

인간은 고독하다!

 

슬픔을 지나,

공포를 넘어,

내 마음의 출렁이는 파도 깊이 가라앉은

아지 못할 깨어진 중량의 침묵이여,

인간은 고독하다!

 

이상이란 무엇이며

실존이란 무엇인가,

그것들의 현대화란 또 무엇인가,

인간은 고독하다!

 

고국에서나

이역에서도

그 하늘을 내 검은 머리 위에

 

고요한 꿈의 이바지같이

내게 딸린 나의 풍물(風物)과 같이

이고 가네

이고 넘었네.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 1963

 

 


 

 

김현승 시인 / 인내

 

 

원수는

그 굳은 돌에

내 칼을 갈게 하지만,

 

인내는

이 어둠의 이슬 앞에

내 칼을 부질없이 녹슬게 하지 않는다.

 

나는 내 칼날을 칼집에 꽂아 둔다.

이 어둠의 연약한 이슬이

오는 햇빛에 눈부시어 마를 때까지……

 

김현승 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김현승 시인 / 일년의 문을 열며

 

 

금을 캐는 광부가 부자는 아니고

전복을 따는 해녀가 반드시

전복을 배불리 먹지도 않는다.

우리의 모든 살림도 이렇듯 흐를 데로

흐르고 돌아갈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국회의사당 앞 오월의 플라타너스들이

시청 지붕 위 푸른 비둘기떼가

날아와 앉던 오월의 플라타너스 잎들이

십일월의 짙은 서리에 무겁게 떨어질 때,

우리의 마음들도 낡은 경험 위에

새로운 지혜를 쌓아 올려야 했다.

그 꼭대기에는 민권의 깃발이 향수처럼

휘날리는……

 

화려한 언어는 본래

침묵으로부터 고귀하게 탄생하듯,

우리는 다시 고요한 새벽과 같은

고요한 일년으로 돌아가서

질주하는 역사의 대낮을 맞아야 했다.

어지럽고 가난한 나라의

아직은 회복된 건강의 연약한 일년―

 

그러나 소풍길에 나선 아이들이

룩샥을 메고 북악산(北岳山)의 새벽 구름을

바라보듯

낙동강 공업지구의 가동하는 기계 소리를

주민들이 귀담아 듣듯

광야를 향하여 서서히 움직이는 기관차에

불붙는 석탄을 집어 넣듯,

 

우리는 일년의 문(門)을 열고,

핏대와 희망과 엇갈린 의견으로

윤기 있게 때묻은 일년의 문(門)을 열고

우리의 길들을 찾아 햇발처럼 쏟아져 나간다.

차도와 보도를 가려 디디며

질서와 자유의 화려한 길을……

 

마지막 지상에서, 창작과비평사, 1975

 

 


 

김현승(金顯承,1913 ~ 1975) 시인

1913년 평양에서 출생. 숭실전문학교 졸업. 장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과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를 스승 양주동의 소개로 1934년 5월 25일 《동아일보》 문화란에 발표하며 시문단에 데뷔. 첫시집 『김현승 詩抄』(1957) 이후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 『절대 고독』(1970), 『김현승시선집』(1974) 등의 시집과 평론집 『한국현대시해설』(1972) 등을 간행. 전라남도문화상·서울시문화상 수상. 1975년 작고 후 시집 『마지막 지상에서』(1975)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