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 시인 / C선생(先生)께
내 그대 앞에 목놓아 울지 않으나 울음보다 더 슬픔을 지닌 채 그대 앞에 섰나이다
어슴푸레한 등불 아래 그래도 빛나는 그대의 눈 천길 촉광 아래 타고 있어라 엎드러진 채 잠잠한 그대 맘 몰려오는 총부리엔 떨지 않도다 도토리 줍기에 가을 해가 바쁜 그대의 숨소리는 낙엽 위에 고요하고 물 그림자 비낀 석양 산비탈 오가는 세상 지껄임 그대 귀담아 참례하지 않도다 갇힌 채 잠잠한 그대의 혼(魂) 날아오는 화살에는 겁이 없도다.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 시인 / 갈숲에서 오는 소리
별은 구름에 들어 잠들고 떨어진 잎 처마 밑에 그므는데 혼혼히 짙어 오는 어둠 속으로 성긴 가시의 설렘, 소곤거림 언제 한 번 귀에 두고 간 꿈 같은 옛날의 지껄임같이도
낙엽(落葉) 위에 그림자 끄는 가을의 옷깃 소리 잠 안 드는 마음줄에 부딪치고 흩어지는 너의 근심!
창 닫고 등 감춘 후 부드러운 잠 속으로 가 볼까 두 귀를 베개에 깃들여도 바람 빨아들이는 깊고 어둔 호흡이 끊였다 이었다 그대로 설렌다 희망과 절망을 함께 껴안고 즐거운 듯 고민하는 그 소리
안온히 감은 눈썹 밑과 조심스레 여민 옷섶에도 산산이 스며드는 미풍(微風) 창백한 부름 속에 애처론 네 뜻을 굳이 몰라지는 이 마음!
바람 자고 구름 가면 네 우수(憂愁)도 걷히리니 맑은 새암 가에 그림자 드리우고 불어 오는 하늘 빛을 마셔 들일 때 마치 어슴푸레한 그의 말소리가 흠 없는 기다림 속에서 맑아지는 것처럼
너와 나는 그 때를 향하여 이 밤을 지어 가도
말 해 다우 내가 얼마나 오늘 밤 너와 함께 또 탄식하고 즐겼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게 비쳐 오는 그 얼굴과 들림 때문에.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 시인 / 국화(菊花)
하얀 섬돌 언저리 귀뚜리 울던 밤은 지나고 서리 아래 맑게 풍기는 하늘의 내음새 상긋이 불어 오는 소향(素香)의 안개
밤도 낮도 없는 마음씨라 베개도 거울도 너는 갖지 않았다 웃음이나 설움이 자랑 아닌 너는 번거로운 화원(花園)에선 멀리 떠난 미(美)의 여인(女人), 성(聖)의 청춘(靑春)
오묘한 말로 못 이르노라 어여쁜 눈짓으로도 못 피게 하노라 별이 시원히 둘린 밤에 신(神)의 손길에서 길러진 품위(品位) 이슬의 아가씨 숨쉬는 고움이여!
해 솟을 무렵 창 앞에 한 그루 소복한 정열(情熱)인가 하면 아련한 의지(意志)에 밝다 마음 감기는 한은 차고 밝음에 더하여 바람 비에 속정 사리고 조용히 피는 향기에 나의 창문은 따뜻하다 검은 옷은 벽에서 치우자 낙엽 아래 다정(多情)한 객(客) 국화 핀 날은.
옥비녀, 동백사,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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