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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모윤숙 시인 / 꺼진 촛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6.

모윤숙 시인 / 꺼진 촛불

 

 

그는 나에게 흰 수건에 싼

가느다란 촛대를 보내며

그 불이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

내 귀에 속삭이고 갔다

 

마음 속 향로 위에

그가 보낸 촛대를 조심히 세웠건만

한 폭의 시절 한 고개의 산도 넘기 전

촛불은 새카맣게 꺼지고 말았네

 

그대가 주신 촛불이

오늘엔 험한 바람에 꺼졌습니다.

가슴에 타오르는 따뜻한 피도

지금은 싸늘히 식었습니다.

 

빛나는 지역, 조선장문사, 1933

 

 


 

 

모윤숙 시인 / 낙동강 물

 

 

천년 신라를 먹이던 물아

너 홀로 푸르러 굽이굽이 흘러라

우리 피곤한 백성에게

네 젖가슴을 풀어 다오

유린도 더럽힘도 모르는 채

오직 이 나라의 어머니로

네가 남았으니……

 

북에는 낯설은 사람들도 왔단다

피리 부는 사람들도 왔고

이단의 희롱이 이처럼 거세인 땅에

너의 언어만은 침착하구나

장미빛 태양을 받들어

우리들 위에 부어 주어라

길게 신의 사랑이 네게 임하도록……

 

풍랑, 문성당, 1951

 

 


 

 

모윤숙 시인 / 남빛 새

 

 

남빛 새

내 영혼의 찬양자!

기쁨과 희망(希望)이던 나의 새

 

어이해 노래를 그쳤는고

더 날지를 못하는고

광채(光彩) 나는 눈동자도 흐리고

순례자(巡禮者)의 성가(聖歌)가 지난 듯한

찬 바람 불리는 내 마음의 사막(沙漠)이여!

 

내 손이 그 나래를 상하지나 않았을까

한겨운 그 죽음을 지은 이가

아아 내 뜻이었다면 내 손길이었다면

어이하랴, 이 한탄은 너무나 길어지리니

 

그렇지도 않거든 나의 가 버린 새여!

다시 노래를 들려 주라

빛나는 눈동자를 한 번 더 밝혀 주라

 

그 바닷빛 같은 푸른 나래로

오랫동안 내 맘에 안위를 주던 너

그 눈동자로

내 어두운 미래를 밝혀 주던 너

 

오! 나의 젊음의 새

무엇에 부딪혀 그 나래는 찢어지고

어이해 그 눈동자는 밤중에 잠겼는고

그 조용한 속삭임도 다시 들을 길 없으니.

 

어두운 분묘의 흔적 같은

내 가슴의 공허(空虛)함이여!

잘 가라 길이 다시 깨지도 말고

내 꿈에 괴로이 방황(彷徨)치도 말라

그러나 쓸쓸한 네 모양이

맘에서 길이 떠나지는 않으리라.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毛允淑) 시인 / 1910년-1990년

호는 영운(嶺雲). 1910년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자랐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35년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선과(選科)를 수료. 그뒤 월간 《삼천리(三千里)》와 중앙방송국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였고, 19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 1937년 장편 산문집 《렌의 애가》를 출간하였다.  8.15광복 뒤에는 문단과 정계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해, 1948년에는 월간문예지《문예》를 발간하는 한편, 1948·1949년에는 국제연합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1950년 대한여자청년단장, 1954년 한국펜클럽 부회장,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사 및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을 거쳐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1년 8대국회에 민주공화당 전국구 대표로 당선되었고, 이후 한국현대시인협회장(1973), 통일원 고문(1974),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1977), 문학진흥재단 이사장(1980) 등을 지냈다. 국민훈장 모란장, 예술원상, 3·1문화상 등을 받았고, 저서에는 《모윤숙 전집》《논개》《렌의 애가》 등이 있다. 196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1970), 1979년 3·1문화상을 받았고, 1991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