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 시인 / 꺼진 촛불
그는 나에게 흰 수건에 싼 가느다란 촛대를 보내며 그 불이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 내 귀에 속삭이고 갔다
마음 속 향로 위에 그가 보낸 촛대를 조심히 세웠건만 한 폭의 시절 한 고개의 산도 넘기 전 촛불은 새카맣게 꺼지고 말았네
그대가 주신 촛불이 오늘엔 험한 바람에 꺼졌습니다. 가슴에 타오르는 따뜻한 피도 지금은 싸늘히 식었습니다.
빛나는 지역, 조선장문사, 1933
모윤숙 시인 / 낙동강 물
천년 신라를 먹이던 물아 너 홀로 푸르러 굽이굽이 흘러라 우리 피곤한 백성에게 네 젖가슴을 풀어 다오 유린도 더럽힘도 모르는 채 오직 이 나라의 어머니로 네가 남았으니……
북에는 낯설은 사람들도 왔단다 피리 부는 사람들도 왔고 이단의 희롱이 이처럼 거세인 땅에 너의 언어만은 침착하구나 장미빛 태양을 받들어 우리들 위에 부어 주어라 길게 신의 사랑이 네게 임하도록……
풍랑, 문성당, 1951
모윤숙 시인 / 남빛 새
남빛 새 내 영혼의 찬양자! 기쁨과 희망(希望)이던 나의 새
어이해 노래를 그쳤는고 더 날지를 못하는고 광채(光彩) 나는 눈동자도 흐리고 순례자(巡禮者)의 성가(聖歌)가 지난 듯한 찬 바람 불리는 내 마음의 사막(沙漠)이여!
내 손이 그 나래를 상하지나 않았을까 한겨운 그 죽음을 지은 이가 아아 내 뜻이었다면 내 손길이었다면 어이하랴, 이 한탄은 너무나 길어지리니
그렇지도 않거든 나의 가 버린 새여! 다시 노래를 들려 주라 빛나는 눈동자를 한 번 더 밝혀 주라
그 바닷빛 같은 푸른 나래로 오랫동안 내 맘에 안위를 주던 너 그 눈동자로 내 어두운 미래를 밝혀 주던 너
오! 나의 젊음의 새 무엇에 부딪혀 그 나래는 찢어지고 어이해 그 눈동자는 밤중에 잠겼는고 그 조용한 속삭임도 다시 들을 길 없으니.
어두운 분묘의 흔적 같은 내 가슴의 공허(空虛)함이여! 잘 가라 길이 다시 깨지도 말고 내 꿈에 괴로이 방황(彷徨)치도 말라 그러나 쓸쓸한 네 모양이 맘에서 길이 떠나지는 않으리라.
옥비녀, 동백사,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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