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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현승 시인 / 지상(地上)의 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7.

김현승 시인 / 지상(地上)의 시

 

 

보다 아름다운 눈을 위하여

보다 아름다운 눈물을 위하여

나의 마음은 지금, 상실의 마지막 잔이라면,

시는 거기 반쯤 담긴

가을의 향기와 같은 술……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사라지는 것만이, 남을 만한 진리임을 위하여

나의 마음은 지금 저무는 일곱시라면,

시는 그곳에 멀리 비추이는

입 다문 창들……

 

나의 마음―마음마다 로맨스 그레이로 두른 먼 들일 때,

당신의 영혼을 호올로 북방으로 달고 가는

시의 검은 기적―

 

천사들에 가벼운 나래를 주신 그 은혜로

내게는 자욱이 퍼지는 언어의 무게를 주시어,

때때로 나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시는

오오, 지상의 신이여, 지상의 시여!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 1963

 

 


 

 

김현승 시인 / 참나무가 탈 때

 

 

 

참나무가 탈 때,

그 불꽃 깨끗하게 튄다.

보석들이 깨어지는 소리를 내며

그 단단한 불꽃들이 튄다.

 

참나무가 탈 때,

그 남은 재 깨끗하게 고인다.

참새들의 작은 깃털인 양 따스하게 남은 재,

부드럽고 빤질하게 고인다.

 

까아만 유리 너머

소리 없이 눈송이가 내리는 밤.

호올로 참나무를 태우며

물끄러미 한 사람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짧은 목숨의 한 세상,

그 헐벗은 불꽃 속에

언제나 단단하고 깨끗하게 타기를 좋아하던,

지금은 마음의 파여 풀레스 안에

아직도 깨끗하고 따스하게 고여 있는,

어리석은 한 사람의 남은 재를 생각한다.

 

煞灼Ñ 고독, 관동출판사, 1968

 

 


 

 

김현승 시인 / 평범한 하루

 

 

파초는 파초일 뿐,

그 옆에 핀

칸나는 칸나일 뿐,

내가 넘기는 책장은 책이 되지 못한다.

 

의자는 의자일 뿐,

더운 바람은 바람일 뿐,

내가 누워 있는 집은 하루 종일

집안이 되지 못한다.

 

그늘은 또 그늘일 뿐,

매미 소리는 또 매미 소리일 뿐,

하루 종일 비취는 햇볕이

내게는 태양이 되지 못한다.

 

넝쿨 장미엔 넝쿨 장미가

담은 담일 뿐

차라리 벽이라도 되지 않는다.

나는 그만큼 이제는 행복하여져 버렸는가?

 

김현승 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김현승 시인 / 하운소묘(夏雲素描)

 

 

그날의 은방울이

하늘에서 울기 전

여섯시엔

산마루의 정말체조(丁抹體操)

삼십분엔 분홍빛 공길 찢어라

태양이 보석처럼 쏟아지게……

 

오전의 해협을 건너오는

너희들의 여름 옷이 이다지도 흰 것은

저 봉우리와 젊은 섬들이

이렇게도 푸른 탓.

 

정오의 사이렌이 채찍 끝처럼

어느 도심에서 휘어지면

일제히 서쪽으로 셔터를 내리는

가로수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소낙비의 급강하 훈련이 없는 오후엔

띄엄띄엄 만화를 그리거나

이발(理髮).

사라진 궁전을 짓기 위하여

푸른 들 끝에 화강암을 나르기도 하고,

 

고가선 너머

도시의 가장자리가 연기에 물드는

보랏빛 시간이 오면

먼 들 끝에 호올로 나아가

제주마(濟州馬)를 몰고 가는 목동이 되든지

그렇지도 않으면

먼 하늘 가에 아름다운 홍포(紅布)를 입은

꿈 속의 성주(城主)라도 한 번 되어 봐야지……

 

마지막 지상에서, 창작과비평사, 1975

 

 


 

김현승(金顯承,1913 ~ 1975) 시인

1913년 평양에서 출생. 숭실전문학교 졸업. 장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과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를 스승 양주동의 소개로 1934년 5월 25일 《동아일보》 문화란에 발표하며 시문단에 데뷔. 첫시집 『김현승 詩抄』(1957) 이후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 『절대 고독』(1970), 『김현승시선집』(1974) 등의 시집과 평론집 『한국현대시해설』(1972) 등을 간행. 전라남도문화상·서울시문화상 수상. 1975년 작고 후 시집 『마지막 지상에서』(1975)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