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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모윤숙 시인 / 논두렁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7.

모윤숙 시인 / 논두렁길

 

 

산도 골짜기도 안 보이는 작은 길에

환히 터진 하늘이 싫고

서툴게 들리는 새 소리도 조심스러워

안 갈 수도 없는 외오리 십리 길

가다가 큰 길이 나오면

유격대가 나오려니

 

그대로 앉아 해를 지울까

해가 지거든 다시 걸을까

어제 자던 무덤 옆이라도 찾아 갈까

 

포격성이 들린다

남에서 오는 기별인가 보다

나를 쏘아 다고, 나를 쏘아 다고.

 

풍랑, 문성당, 1951

 

 


 

 

모윤숙 시인 / 달밤

 

 

지하실 침침한 냄새를 피해

밤을 타서 가만히 뜰로 나왔다

장독대 항아리 뒤에

몸을 숨기고 달을 훔쳐 안아 본다

 

`열두 시가 되면 ○○군이 들어와요

의용병 잡으러 막 들어와요

어젯밤엔 뒷집 소년이 자다가 갔어요

에그! 우리 아들은 오늘 낮에 잡혀 갔어요'

그래 언제 국군은 서울로 들어선대요

`쉬쉬, 들어들 갑시다 암말 말아요'

 

할머니는 토방(土房)마루에 흑흑 느낀다

달은 더 조용한 설움의 덩이

함빡 젖은 내 뺨에

그리운 사람들이 꽃피듯 환하건만

시체처럼 차고 어두운 지하실로

나는 달을 피해 들어가야 했다.

 

풍랑, 문성당, 1951

 

 


 

 

모윤숙 시인 / 떠나는 카츄샤

 

 

어둡고 험한 광야 밤은 깊은데

늦어진 밤길을 홀로 걷는 여자를 보라

풀어진 머리 창백한 얼굴

그는 이제 사나이의 가슴에 안긴

아름다운 천사가 아니다

그의 울분에서 터지는 싸늘한 고함은

사현금 깊은 숲에서 들리는 종달새

노래도 아니다

그 소리! 그 마음의 저항은

운명의 바퀴를 깨물고 흐르며

위선자의 웃는 얼굴을 창백케 하리니

시베리아 쌓인 눈

짓밟힘의 괴롬

위협과 속임에 떨던 마음

낡은 담 밑에서 속삭이던 사랑

아아 그 아픔을 어이 기억하랴

해는 지고 별도 없는 캄캄한 광야에

눈물로 길 적시며 헤매는 여인을 보라.

 

빛나는 지역, 조선장문사, 1933

 

 


 

모윤숙(毛允淑) 시인 / 1910년-1990년

호는 영운(嶺雲). 1910년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자랐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35년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선과(選科)를 수료. 그뒤 월간 《삼천리(三千里)》와 중앙방송국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였고, 19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 1937년 장편 산문집 《렌의 애가》를 출간하였다.  8.15광복 뒤에는 문단과 정계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해, 1948년에는 월간문예지《문예》를 발간하는 한편, 1948·1949년에는 국제연합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1950년 대한여자청년단장, 1954년 한국펜클럽 부회장,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사 및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을 거쳐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1년 8대국회에 민주공화당 전국구 대표로 당선되었고, 이후 한국현대시인협회장(1973), 통일원 고문(1974),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1977), 문학진흥재단 이사장(1980) 등을 지냈다. 국민훈장 모란장, 예술원상, 3·1문화상 등을 받았고, 저서에는 《모윤숙 전집》《논개》《렌의 애가》 등이 있다. 196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1970), 1979년 3·1문화상을 받았고, 1991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