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 시인 / 논두렁길
산도 골짜기도 안 보이는 작은 길에 환히 터진 하늘이 싫고 서툴게 들리는 새 소리도 조심스러워 안 갈 수도 없는 외오리 십리 길 가다가 큰 길이 나오면 유격대가 나오려니
그대로 앉아 해를 지울까 해가 지거든 다시 걸을까 어제 자던 무덤 옆이라도 찾아 갈까
포격성이 들린다 남에서 오는 기별인가 보다 나를 쏘아 다고, 나를 쏘아 다고.
풍랑, 문성당, 1951
모윤숙 시인 / 달밤
지하실 침침한 냄새를 피해 밤을 타서 가만히 뜰로 나왔다 장독대 항아리 뒤에 몸을 숨기고 달을 훔쳐 안아 본다
`열두 시가 되면 ○○군이 들어와요 의용병 잡으러 막 들어와요 어젯밤엔 뒷집 소년이 자다가 갔어요 에그! 우리 아들은 오늘 낮에 잡혀 갔어요' 그래 언제 국군은 서울로 들어선대요 `쉬쉬, 들어들 갑시다 암말 말아요'
할머니는 토방(土房)마루에 흑흑 느낀다 달은 더 조용한 설움의 덩이 함빡 젖은 내 뺨에 그리운 사람들이 꽃피듯 환하건만 시체처럼 차고 어두운 지하실로 나는 달을 피해 들어가야 했다.
풍랑, 문성당, 1951
모윤숙 시인 / 떠나는 카츄샤
어둡고 험한 광야 밤은 깊은데 늦어진 밤길을 홀로 걷는 여자를 보라 풀어진 머리 창백한 얼굴 그는 이제 사나이의 가슴에 안긴 아름다운 천사가 아니다 그의 울분에서 터지는 싸늘한 고함은 사현금 깊은 숲에서 들리는 종달새 노래도 아니다 그 소리! 그 마음의 저항은 운명의 바퀴를 깨물고 흐르며 위선자의 웃는 얼굴을 창백케 하리니 시베리아 쌓인 눈 짓밟힘의 괴롬 위협과 속임에 떨던 마음 낡은 담 밑에서 속삭이던 사랑 아아 그 아픔을 어이 기억하랴 해는 지고 별도 없는 캄캄한 광야에 눈물로 길 적시며 헤매는 여인을 보라.
빛나는 지역, 조선장문사,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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