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시인 / 장미
맘 속 붉은 장미를 우지직끈 꺾어 보내 놓고 그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
늬 수정 같은 맘에 나 한 점 티 되어 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
차라리 얼음같이 얼어 버리련다 하늘보다 나무모양 우뚝 서 버리련다 아니 낙엽처럼 섧게 날아가 버리련다
창변, 매일신보사, 1945
노천명 시인 / 저녁별
그 누가 하늘에 보석을 뿌렸나 작은 보석 큰 보석 곱기도 하다 모닥불 놓고 옥수수 먹으며 하늘의 별을 세던 밤도 있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두울 나 두울 논 뜰엔 당옥새 구슬피 울고 강낭수숫대 바람에 설렐 제 은하수 바라보면 잠도 멀어져
물방아 소리―들은 지 오래 고향 하늘 별 뜬 밤 그리운 밤 호박꽃 초롱에 반딧불 넣고 이즈음 아이들도 별을 세는지
창변, 매일신보사, 1945
노천명 시인 / 창변(窓邊)
서리 내린 지붕 지붕엔 밤이 앉고
그 안엔 꽃다운 꿈이 딩굴고
뉘 집인가 창이 불빛을 한입 물었다 눈비탈이 하늘 가는 길처럼 밝구나
그 속엔 숱한 얘기들을 줍고 있으면 어려서 잊어버린 `집'이 살아났다
창으로 불빛이 나오는 집은 다정해 볼수록 정다워
저 앞엔 엄마가 있고 아버지도 살고 그리하여 형제들은 다행(多幸)하고―
마음이 가난한 이는 눈을 모아 고운 정경을 한참 마시다―
아늑한 `집'이 온갖 시간에 빌려졌다
친정엘 간다는 새댁과 마주앉은 급행 열차 밤 찻간에서도 중년 신사는 나비 넥타이를 찾고 유복한 부인은 물건을 온종일 고르고 백화점 소녀는 피곤이 밀린 잡답(雜沓) 속에서도
또 어느 조고만 집 명절 떡 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기댈 데 없는 외로움이 박쥐처럼 퍼덕이면 눈감고. 가다가 슬프면 하늘을 본다
창변, 매일신보사,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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