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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노천명 시인 / 장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8.

노천명 시인 / 장미

 

 

맘 속 붉은 장미를 우지직끈 꺾어 보내 놓고

그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

 

늬 수정 같은 맘에

한 점 티 되어 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

 

차라리 얼음같이 얼어 버리련다

하늘보다 나무모양 우뚝 서 버리련다

아니

낙엽처럼 섧게 날아가 버리련다

 

창변, 매일신보사, 1945

 

 


 

 

노천명 시인 / 저녁별

 

 

그 누가 하늘에 보석을 뿌렸나

작은 보석 큰 보석 곱기도 하다

모닥불 놓고 옥수수 먹으며

하늘의 별을 세던 밤도 있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두울 나 두울

논 뜰엔 당옥새 구슬피 울고

강낭수숫대 바람에 설렐 제

은하수 바라보면 잠도 멀어져

 

물방아 소리―들은 지 오래

고향 하늘 별 뜬 밤 그리운 밤

호박꽃 초롱에 반딧불 넣고

이즈음 아이들도 별을 세는지

 

창변, 매일신보사, 1945

 

 


 

 

노천명 시인 / 창변(窓邊)

 

 

서리 내린

지붕 지붕엔 밤이 앉고

 

그 안엔 꽃다운 꿈이 딩굴고

 

뉘 집인가 창이 불빛을 한입 물었다

눈비탈이

하늘 가는 길처럼 밝구나

 

그 속엔 숱한 얘기들을 줍고 있으면

어려서 잊어버린 `집'이 살아났다

 

창으로 불빛이 나오는 집은 다정해

볼수록 정다워

 

저 앞엔 엄마가 있고

아버지도 살고

그리하여 형제들은 다행(多幸)하고―

 

마음이 가난한 이는 눈을 모아

고운 정경을 한참 마시다―

 

아늑한 `집'이 온갖 시간에 빌려졌다

 

친정엘 간다는 새댁과 마주앉은

급행 열차 밤 찻간에서도

중년 신사는 나비 넥타이를 찾고

유복한 부인은 물건을 온종일 고르고

백화점 소녀는 피곤이 밀린 잡답(雜沓) 속에서도

 

또 어느 조고만 집 명절 떡 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기댈 데 없는 외로움이 박쥐처럼 퍼덕이면

눈감고.

가다가

슬프면 하늘을 본다

 

창변, 매일신보사, 1945

 

 


 

노천명(盧天命, 1912∼1957) 시인

1912년 황해도의 장연(長淵)에서 출생.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 졸업.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 《신동아》 6월호에 〈밤의 찬미(讚美)> 를 발표하며 데뷔. 저서로는 시집으로 1938년 초기의 작품 49편을 수록한 제1시집 『산호림(珊瑚林)』,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된 1945년 2월 출간된 제2시집 『창변(窓邊)』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어 옥중시와 출감 후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 1953년  출간된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와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 등이 있음. 195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