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 시인 / 무덤에 내리는 소낙비
썩은 냄새에 몸이 저리다 헐린 무덤 새에 번개에 몰리는 소나기 내리는 밤 짙은 칠빛으로 웅웅거리고 파도 같은 바람이 머리올을 끄은다
해골이 고운 옷을 입고 요녀처럼 웃는다 그는 다시 옷을 벗고 길다란 엿가락이 되어 입을 벌린다
몸은 벌써 석고처럼 굳었건만 마음은 살아 무서움과 싸운다
차라리 나는 진비를 맞으며 시체 곁에 죽음을 빈다.
풍랑, 문성당, 1951
모윤숙 시인 / 묵도(黙禱)
나에게 시원한 물을 주든지 뜨거운 불꽃을 주셔요 덥지도 차지도 않은 이 울타리 속에서 어서 나를 처치해 주셔요
주여, 나를 이 황혼 같은 빛깔에서 빼어 내시와 캄캄한 저주를 내리시든지 광명한 복음을 주셔요 이 몸이 다아 시들기 전에 오오 주여!
빛나는 지역, 조선장문사, 1933
모윤숙 시인 / 물 긷는 색시
아침의 나라 백두하반(白頭河畔)에 전설을 안고 도는 여신과도 같이 물동이 허리에 휘감긴 팔목 그는 조선의 얌전한 아낙네러라
*
감싸서 돌린 치마 바쁜듯 팔랑이고 쪽진 머리 석양에 유난히도 아름다워 하늘가에 한가히 떠도는 그 눈 그는 피어 오른 한 개의 장미 같구나
*
떠오르는 샘 속에 쪽바가지 자주 넣어 날마다 물동이 채워 가나니 온 집안 식구의 생명의 선을 가진 어여쁠사 이 땅의 물 긷는 아낙네여!
옥비녀, 동백사, 1947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윤숙 시인 / 밀밭에 선 여자 외 2편 (0) | 2020.01.19 |
---|---|
노천명 시인 / 추성(秋聲) 외 2편 (0) | 2020.01.19 |
노천명 시인 / 장미 외 2편 (0) | 2020.01.18 |
김현승 시인 / 형광등 외 3편 (0) | 2020.01.18 |
모윤숙 시인 / 논두렁길 외 2편 (0) | 2020.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