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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노천명 시인 / 추성(秋聲)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9.

노천명 시인 / 추성(秋聲)

 

 

푸라타나쓰의 표정이 어느 틈에 이렇게 달라졌나

 

하늘을 쳐다본다

청징한 바닷가에 다시 은하가 맑다

눈을 땅으로 떨어뜨리며

내가 당황하다

 

창변, 매일신보사, 1945

 

 


 

 

노천명 시인 / 춘분

 

 

한고방 재어 놨던 석탄이 휑하니 나간 자리

숨었던 봄이 드러났다

 

얼래 시골은 지금 뱀 나왔갔늬이

 

남쪽 계집아이는 제 집이 생각났고

나는 고양이처럼 노곤하다

 

창변, 매일신보사, 1945

 

 


 

 

노천명 시인 / 춘향

 

 

검은 머리채에 동양여인의 `별'이 깃든다

 

"도련님 인제 가면 언제나 오실라우 벽에 그린 황계 짧은 목

길게 늘여 두 날개 탁탁 치고 꼭꾜하면 오실라우

계집의 높은 절개 이 옥지환과 같을 것이오 천만 년이 지나간들

옥빛이야 변할납디여"

 

옥가락지 위에 아름다운 전설을 걸어 놓고

춘향은

사랑을 위해 달게 형틀을 졌다

 

옥 안에서 그는 춘(椿)꽃보다 더 짙었다

 

밤이면 삼경을 타 초롱불을 들고 향단이가 찾았다

춘향 "야아 향단아 서울서 뭔 기별 업디야"

향단 "기별이라우? 동냥치 중에 상동냥치 돼 오셨어라우"

춘향 "야야 그것이 뭔 소리라냐―

행여 나 없다 괄세 말고 도련님께 부디 잘해 드려라"

 

무릇 여인 중

너는

사랑할 줄 안

오직 하나의 여인이었다

 

눈 속의 매화 같은 계집이여

칼을 쓰고도 너는 붉은 사랑을 뱉어 버리지 않았다

한양 낭군 이도령은 쑥스럽게

`사또'가 되어 오지 않아도 좋았을 게다

 

창변, 매일신보사, 1945

 

 


 

노천명(盧天命, 1912∼1957) 시인

1912년 황해도의 장연(長淵)에서 출생.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 졸업.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 《신동아》 6월호에 〈밤의 찬미(讚美)> 를 발표하며 데뷔. 저서로는 시집으로 1938년 초기의 작품 49편을 수록한 제1시집 『산호림(珊瑚林)』,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된 1945년 2월 출간된 제2시집 『창변(窓邊)』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어 옥중시와 출감 후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 1953년  출간된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와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 등이 있음. 195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