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수 시인 / 갈매기 소묘(素描)
1
하늘이 낮게 드리고 물 면(面)이 보푸는 그 눌리워 팽창한 공간에 가쁜 갈매기 하나 있었다.
2
바람이 일고 물이 결을 흔드는 그 설레임에 떠 있던 갈매기는 그저 뒤척이는 한가운데서 중심을 잡고 있었다.
3
내려 꼰지는 바람의 방향에 꼰지고, 튀치는 바람결에 물 면(面)을 차고, 치솟아 어지러운 바람 속에 갈매기는 가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4
꿈 같은 자부림 천심(千尋) 깊이에 깔먹는 중량 휘뚝 치솟아 몸을 가누며 갈매기는 꺄륵 꺄륵 노곤한 쭉지를 흔들어 본다.
5
휘딱 물 면(面)을 때리고 가다듬으면 놀라운 푸름. 갈매기는 파랗게 질려 파란 갈매기. 면(面) 위에 갈매기는 혼자 있었다.
6
혼자면 또한 가슴에 스미는 고독을 안고 벅찬 기류 속에 갈매기는 축제 같은 어제를 생각한다. 헤아리지 못할 어제가 즐거움 같고, 즐거움이 어제 같은 오늘, 오늘은 없었다.
7
없는 오늘에 갈매기는 떠 있었다. 없는 바람 속에 내려 꼰지는 방향으로 꼰지고, 튀치면 튀솟는 제 그림자. 어쩌면 갈매기는 육면 거울 속에 춤추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8
덜덜덜 말리는 자꾸 솟구쳐 끝없이 깔먹는 이 구겨진 무한한 푸름에 휘뚝 놀라면 물러섰다가는 다시 가다듬고, 가다듬고는 그 물 위에 노여운 지축을 때린다.
9
찢어지는 분통을 메다쳐 보다가는 서러워서 꺄륵 꺄륵 울어도 본다. 어쩔 수 없어서 공중에 그냥 서서 잠깐 누그러치고 눈을 붙여도 본다.
10
드리운 하늘 보푸는 물 면(面) 그 눌림 속에 태양은 아예 없었다. 알알이 따로 노는 보석이 끓는 물이랑 위에, 갈매기는 본디 살고 있었다. 옛날에……옛날에…… 갈매기는 한 번 웃어 본다.
11
칠흑의 어디를 뚫으면 핏물 같은 빛이 흐를까 알알이 따로 뿜는 보석이 끓는 불 면(面)에 지도 따로 뿜는 광채이고 싶었다.
12
지지눌려 숨가쁜 갈매기 하나 있었다. 스스로는 가지 못하는 방향에 밀리는 갈매기는 흰 갈매기는 불안한 물 면(面)에서 꺄륵꺄륵 기울면서 꿈이 꾸고 싶은 갈매기는 흰 갈매기는 영원한 내일을 꿈처럼 그려 사는 것인지도 기실은 알 수 없다.
매기 소묘(素描), 춘조사, 1958
박남수 시인 / 강(江)
밤새도록 충혈(充血)된 등(燈)이 하나 검은 강(江)을 비추고 있다.
도시(都市)의 가슴을 뚫고 흐르는 강(江)은 산물소리처럼 맑지 않지만, 가끔 점벙 물고기 뛰는 소리를 낸다.
사위(四圍)가 어두워서 잘못 길을 잡은 물고기는 오예(汚濊)의 물을 마시고 한 길을 뛰어오르는 고통(苦痛)을 치솟는가. 밤새도록 충혈(充血)된 등(燈)이 하나 검은 강(江)을 비추고 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강(江)물의 띠를 두르고
강(江)물의 띠를 두르고 밀양(密陽), 저녁 놀이 서는 어느 주막(酒幕)에는 은어회가 일품(一品)이란다. 그물을 던져 거둬 올리는 붉은 놀 속에서 은어(銀魚)가 뛴다. 초라한 식탁(食卓)에서도 은어(銀魚)가 뛴다. 친구의 금 이빨이 무는 은빛의 디스토마를 삼킨다. 우리가 먹는 것은 형이하(形而下)의 오염(汚染)뿐 나의 가슴 속에서는, 조금도 은어(銀魚)가 뛰지 않는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거리(距離)
남포불에 부우염한 대합실(待合室)에는 젊은 여인과 늙은이의 그림자가 크다랗게 흔들렸다.
―네가 가문 내가 어드케 눈을 감으란 말이가.
경편열차(輕便列車)의 기적(汽笛)이 마을을 흔들 때, 여인은 차창(車窓)에 눈물을 글썽글썽하였다.
―네가 가문 누굴 믿구 난 살난?
차(車)가 굴러 나가도 늙은이는 사설을 지껄였다.
―데놈의 기차가 내 며누리를 끌구 갔쉬다가레.
초롱불, 삼문사,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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