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 시인 / 소망
나는 때때로 칠빛 나는 어둠에서 신음하는 내 혼의 소리를 듣습니다 막힌 골짜기 서려 있는 안개 밑으로 빠져 가는 내 발길을 봅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머리를 들고 구름 속에 속삭이는 외마디 음성을 들어요 또 한 번 더 웃어 보라 또 한 번 더 일어나 보라는
저 앞엔 나를 기다리는 등대 있어 날마다 내 손길을 불러 줍니다 저 높은 미래의 하늘에는 승리한 은빛 십자가(十字架) 나의 생을 비쳐 줍니다
그 등대 앞에 내 몸이야 가든 말든 오늘의 길을 쉬지 않고 걸을랍니다 그 십자가(十字架) 밑의 샘물이야 마시든 말든 오늘의 내 눈은 쉬지 않고 그 빛을 바라봅니다
가다가 이 몸이 부서져도 그 등대 바라고 힘을 냅니다 사나운 바람이 그 길을 막는대도 진실한 하루의 일은 끊지 않으렵니다
이 한 줄의 굳은 희망을 끊을 자 뉘뇨 이 한 길의 오랜 침묵을 비난할 자 뉘뇨 목숨이야 비탈에서 빼앗기든 말든 그 한 빛에 내 조국은 안기고 말 것을.
빛나는 지역, 조선장문사, 1933
모윤숙 시인 / 아내의 소원
자욱한 숲 속에 벌레 소리 조심스럽고 맑은 듯 안개 낀 먼 하늘엔 신들메 보살피란 재촉이 들리노니 포근히 잠든 그를 깨우기 어려워
그러나 이는 아내의 작은 인정의 하나 떠나 보낼 생각에 아픔이 무어랴 연기처럼 몰려오는 소란한 소리 우리 성문의 저녁 햇빛은 떨고 있다
오오 보내는 아내의 맘 쓰린 눈물 없을 거냐 온 누리를 위하여 장엄히 나서는 양 굳센 듯 강한 힘 온 하늘에 뻗쳤으니 아, 아내의 정으로 갈 길 어이 막으리
강물 위에 철벅이는 수많은 말굽소리 고함치는 무리의 아우성 분명하오 일어나 말 타고 쏜살같이 달리소서 오오! 나는 피 묻은 옷자락을 탑 위에서 받으리다.
빛나는 지역, 조선장문사, 1933
모윤숙 시인 / 애기의 창(窓)
공단 숲에 어린 바람 숨바꼭질하고 앵두빛 잔디숲에 물들었다 발자욱마다 솟아나는 웃음 샘! 터져도 끝없는 작은 마음의 샘
네 마음 무에라 지껄이누나 크게 또 조용히! 하늘도 나직한 속삭임에 나래 숙이고 조용히 네 향기를 빨아 간다
소리 없는 바람이 어린 머리에 날고 피어 오른 봄 잎새가 네 장난에 귀를 둔다 네 마음은 생명(生命)의 음악실(音樂室)! 네 즐거움은 봄날의 종달이
무거운 생각 피곤한 마음, 닿을 곳 없더니 문득 아가의 뛰는 모습에 휘감겨 가벼워지는 듯! 이다지도 그 아름다운 놀이터에 그 마음 숲에 기대고 싶어진다.
옥비녀, 동백사,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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