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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모윤숙 시인 / 소망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0.

모윤숙 시인 / 소망

 

 

나는 때때로 칠빛 나는 어둠에서

신음하는 내 혼의 소리를 듣습니다

막힌 골짜기 서려 있는 안개 밑으로

빠져 가는 내 발길을 봅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머리를 들고

구름 속에 속삭이는 외마디 음성을 들어요

또 한 번 더 웃어 보라

또 한 번 더 일어나 보라는

 

저 앞엔 나를 기다리는 등대 있어

날마다 내 손길을 불러 줍니다

저 높은 미래의 하늘에는

승리한 은빛 십자가(十字架) 나의 생을 비쳐 줍니다

 

그 등대 앞에 내 몸이야 가든 말든

오늘의 길을 쉬지 않고 걸을랍니다

그 십자가(十字架) 밑의 샘물이야 마시든 말든

오늘의 내 눈은 쉬지 않고 그 빛을 바라봅니다

 

가다가 이 몸이 부서져도

그 등대 바라고 힘을 냅니다

사나운 바람이 그 길을 막는대도

진실한 하루의 일은 끊지 않으렵니다

 

이 한 줄의 굳은 희망을 끊을 자 뉘뇨

이 한 길의 오랜 침묵을 비난할 자 뉘뇨

목숨이야 비탈에서 빼앗기든 말든

그 한 빛에 내 조국은 안기고 말 것을.

 

빛나는 지역, 조선장문사, 1933

 

 


 

 

모윤숙 시인 / 아내의 소원

 

 

자욱한 숲 속에 벌레 소리 조심스럽고

맑은 듯 안개 낀 먼 하늘엔

신들메 보살피란 재촉이 들리노니

포근히 잠든 그를 깨우기 어려워

 

그러나 이는 아내의 작은 인정의 하나

떠나 보낼 생각에 아픔이 무어랴

연기처럼 몰려오는 소란한 소리

우리 성문의 저녁 햇빛은 떨고 있다

 

오오 보내는 아내의 맘 쓰린 눈물 없을 거냐

온 누리를 위하여 장엄히 나서는 양

굳센 듯 강한 힘 온 하늘에 뻗쳤으니

아, 아내의 정으로 갈 길 어이 막으리

 

강물 위에 철벅이는 수많은 말굽소리

고함치는 무리의 아우성 분명하오

일어나 말 타고 쏜살같이 달리소서

오오! 나는 피 묻은 옷자락을 탑 위에서 받으리다.

 

빛나는 지역, 조선장문사, 1933

 

 


 

 

모윤숙 시인 / 애기의 창(窓)

 

 

공단 숲에 어린 바람 숨바꼭질하고

앵두빛 잔디숲에 물들었다

발자욱마다 솟아나는 웃음 샘!

터져도 끝없는 작은 마음의 샘

 

네 마음 무에라 지껄이누나 크게 또 조용히!

하늘도 나직한 속삭임에 나래 숙이고

조용히 네 향기를 빨아 간다

 

소리 없는 바람이 어린 머리에 날고

피어 오른 봄 잎새가 네 장난에 귀를 둔다

네 마음은 생명(生命)의 음악실(音樂室)!

네 즐거움은 봄날의 종달이

 

무거운 생각 피곤한 마음, 닿을 곳 없더니 문득 아가의 뛰는 모습에 휘감겨 가벼워지는 듯! 이다지도 그 아름다운 놀이터에 그 마음 숲에 기대고 싶어진다.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毛允淑) 시인 / 1910년-1990년

호는 영운(嶺雲). 1910년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자랐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35년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선과(選科)를 수료. 그뒤 월간 《삼천리(三千里)》와 중앙방송국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였고, 19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 1937년 장편 산문집 《렌의 애가》를 출간하였다.  8.15광복 뒤에는 문단과 정계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해, 1948년에는 월간문예지《문예》를 발간하는 한편, 1948·1949년에는 국제연합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1950년 대한여자청년단장, 1954년 한국펜클럽 부회장,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사 및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을 거쳐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1년 8대국회에 민주공화당 전국구 대표로 당선되었고, 이후 한국현대시인협회장(1973), 통일원 고문(1974),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1977), 문학진흥재단 이사장(1980) 등을 지냈다. 국민훈장 모란장, 예술원상, 3·1문화상 등을 받았고, 저서에는 《모윤숙 전집》《논개》《렌의 애가》 등이 있다. 196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1970), 1979년 3·1문화상을 받았고, 1991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