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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남수 시인 / 거울 -1-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0.

박남수 시인 / 거울 -1-

 

 

살아 있는 얼굴을

죽음의 굳은 곳으로 데리고 가는

거울의 이쪽은 현실이지만

저쪽은 뒤집은 현실.

저쪽에는 침묵으로 말하는

신처럼 온몸이 빛으로 맑게 닦아져 있다.

사람은 거울 앞에서

신의 사도처럼 어여쁘게 위장하고

어여쁘게 속임말을 하는

뒤집은 현실의 뒤집은 마을의 주민이다.

거울은 맑게 닦아진 육신을 흔들어

지저분한 먼지를 털듯, 언제나

침묵으로 말하는 신처럼 비어 있다.

비어서 기다리고 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거울 -2-

 

 

한 마리의 새에도 민감한 눈이다.

때로는 이즈러지는 표정으로

모든 물상을 찌그러뜨리는 불평꾼이다.

오른편은 왼편으로 바꿔 놓고

왼편은 오른편으로 바꿔 놓는

세상 제일의 장난꾼이다.

 

탐욕한 눈은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여인들은 그 앞에 서면 옷을 벗는 마술을,

부끄럼도 아무것도 털어버리는

고회(告悔)의 소슬한 종교.

 

거울은 곱게 닦고

온갖 물상과 조용히 이야기한다,

세상 제일의 장난꾼은 물상을 뒤집어 놓지만

상하(上下)를 바꿔 놓지 않는

정연한 질서의 집.

 

지금은 비어 있는 시간.

햇볕이 거울에서 꺾이어

천정으로 뛰어 오르는 장난스런 시간.

햇볕은 지상으로 내리는

무한한 강하(降下)를 즐겨왔지만, 지금은

천정으로 뛰어 올라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있다.

장자(莊子)의 꿈 속 같은 긴 시간을

거울은 속으로 속으로 보듬고 있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겨자씨만한 육신(肉身)을

 

 

겨자씨만한 육신(肉身)을

육척(六尺)으로 키운 이십년을

겨자씨만한 소견(所見)을

우주(宇宙)의 크기로 불린 오십년을

되돌아보며, 지팡이로

겨우 스스로를 부지(扶持)하는 칠십년을

이 거짓의 크기에 눌리어

꺼져 버린 풍선(風船)처럼

저 긴장이 빠진 공허(空虛)를, 무덤에

덮으면 종말(終末)은 원초(原初)로 돌아가는

겨자씨만한 육신(肉身)을.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고독(孤獨)

 

 

인간의 발자국 소리가 끊어진

통금시간(通禁時間)의 이승 쪽에는

사만년(四萬年) 전(前)의 고독이 깔린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의 사나이처럼

가는 모가지 위에

여윈 얼굴을 얹고

어디라 없이 흐린 시력(視力)은

이승 쪽의 관심을 잃어가고 있다.

문명(文明)의 묘지(墓地)에 갇혀

긴 밤의 시간(時間)을, 어쩌나

사람의 이야기가 끊어진 시간에

어쩌나, 이 뜬 눈을.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귀

 

 

귀를 기울인다.

나는 지금 음악을 찾고 있다.

나의 귀는 꼭또의 조개껍질

먼 바다의 소리가 들린다.

새의 지저귐도

귀뚜라미도 들린다.

귀에 손을 덧대고

나는 귀를 기울인다.

나는 지금 음악을 찾고 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들리지 않기 시작한다,

비인 속에

오직 하나만의 존재처럼

지금 나는 모든 것을 다시 듣는다.

베에토오벤의 귀.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박남수(朴南秀) 시인(1918.5.3-1994.9.17)

평양 출생. 숭실상고를 거쳐 1941년 일본 주오(中央)대학을 졸업. 초기에는 자연적 서경과 서정 속에서 절박한 감정을 은유적으로 환기하는 시를 썼으며, 후기에는 존재성을 규명하려는 주지적 경향을 가졌다.  유학 시절 제1회 <문장>지의 추천을 받은 김종한, 이용악 등과 사귀게 되면서, 그들의 권유로 <문장>지에 투고하였는데,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정지용에게 추천됨.  1940년에 첫 시집인 <초롱불>을 낸 이후 "갈매기 소묘" "새의 암장(暗葬)" 등 정갈하면서도 의식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시를 써 왔다. 미국에서 지낸 이국 생활의 외로움을 그린 <그리고 그 이후>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함. 1957년에는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장만영 등과 함께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했으며, 아시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1994년 6월에는 조국 통일에의 절실한 심경을 노래한 시 "꿈의 물감"으로 서울신문사가 제정한 공초(空超)문학상(제2

회)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