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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노천명 시인 / 출범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0.

노천명 시인 / 출범

 

 

기선이 떠나고 난 항구에는

끊어진 테잎들만 싱겁게 구을르고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처럼……

바다는 다시 침묵을 쓰고 누웠다

 

마녀의 불길한 예언도 없었건만

건너기 어려운 바다를 사이에 두기로 했다

마지막 말을 삼키고……

영영 떠나 보내는 마음도 실은 강하지 못했다

선조 때 이 지역은 저주를 받은 일이 있어

비극이 머리 들기 쉬운 곳이란다

 

검푸른 칠월의 바닷가 모랫불―

늙은 소라 껍데기 속엔 이야기 하나가 더 불었다

 

물을 차는 제비처럼 가벼웠으면……하나

마음의 마음은 광주리 속을 자꾸 뒤적거려

배가 나간 뒤도 부두를 떠나지 못하는 부은 맘은

바다 저편에 한여름 흰 꿈을 새우다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 시인 / 포구의 밤

 

 

마술사 같은 어둠이 꿈틀거리며

무거운 걸음새로 기어드니

찌푸린 하늘엔 별조차 안 보이고

바닷가 헤매는 물새의 울음소리

엄마 찾는 듯…… 내 애를 끓네

 

한가람 청풍(淸風) 물 위를 스치고 가니

기슭에 나룻배엔 등불만 조을고

사공의 노랫가락 마디마디 구슬퍼

호수같이 고요하던 마음 바다에 잔물결 이니

한때의 옛 곡조 다시 떠도네

 

이 바다 물결에 내 노래 띄워―

그 물결 닿는 곳마다 펼쳐나 보리

바위에 부딪치는 구원의 물 소리

 

내 그윽한 느낌에 눈감고 듣노니

마산포(馬山浦)의 밤은 말없이 깊어만 가는데……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 시인 / 호외

 

 

큰 불이라도 나라 폭탄 사건이라도 생겨라

외근에서 들어오는 전화가

비상(非常)하기를 바라는 젊은 편집자

그는 잔인한 인간이 아니다

저도 모르게 되어진 슬픈 기계다

 

그 불이 방화가 아니라 보고될 때

젊은이의 마음은 서운했다

화필이 재빠르게 미끄러진다

잠바―노타이―루바쉬카의 청년―청년―

싱싱하고 미끈한 양(樣)들이

해군복이라도 입히고 싶은 맵시다

 

오늘은 또 저 붓끝이 몇 사람을 찔렀느냐

젊은이 수기(手記)에 참화가 있는 날

그날은 그날은 무서운 날일지도 모른다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盧天命, 1912∼1957) 시인

1912년 황해도의 장연(長淵)에서 출생.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 졸업.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 《신동아》 6월호에 〈밤의 찬미(讚美)> 를 발표하며 데뷔. 저서로는 시집으로 1938년 초기의 작품 49편을 수록한 제1시집 『산호림(珊瑚林)』,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된 1945년 2월 출간된 제2시집 『창변(窓邊)』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어 옥중시와 출감 후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 1953년  출간된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와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 등이 있음. 195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