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 시인 / 밀밭에 선 여자
수기(愁氣)에 물들지 않은 명랑한 석양 남부 고려의 한 촌락이 유(柔)한 바람에 미소한다
고운 발자국 소리 밭 사이에 사운사운 광우리 들린 젊음 손 보라빛 다인 밀밭 속에 사랑홉다
별은 어둠에 안겨 땅 저편으로 떠 오고 고개와 이랑으로 아가의 꿈같이 느즈러이 송아지는 풀을 찾는데 그 처녀의 눈은 푸른 들을 머금은 채 하늘 끝 명상에 쉰다 장미의 신이 그 얼굴에 피어나 흰 구름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는 저녁 몸을 단장할 올리브 향수를 생각지 않으리니 밤 이슬로 자라 가는 추수 나라의 여인(女人)이여 그대 세계(世界)의 모든 미녀(美女)보다 아름답고나
성소에서 듣는 기도의 음향을 나는 지금 그 여자(女子)의 심장에서 듣노라 늙은 회나무에 기대어 오랜 설움을 헤아리다가.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 시인 / 빛나는 지역(地域)
수만 별들이 하늘에 열리듯이 이 땅엔 먼 앞날이 빛나고 있다 은풍(銀風)에 감겨진 아름다운 복지의 우리의 긴 생명은 영원히 뻗어 가리
너도 나도 섞이지 않은 한 피의 줄기요 물들지 않은 조선의 자손이니 맑은 시내 햇빛 받는 언덕에 우렁찬 출발의 선언을 메고 가는 우리라네
포도원 넝쿨 안에 옛 노래 흩어지고 소와 말 한가로이 주인의 뒤를 따르는 사천년 황혼에 길이 떠오르는 별 휘넓은 창공 위에 무덤을 밟고 섰네
기려(奇麗)한 산봉우리 조용한 물줄기 오고 가는 행인의 발길을 끄으나니 명상하는 선녀처럼 고요한 산이여 너는 나의 영원한 사랑의 가슴일러라
위로 고른 풍우 이 땅에 영원하고 아래로 기름진 넓은 들 이 땅은 빛나라 아픔 없으라 생명도 참되거라 길이 가거라
수만 별들이 하늘에 열리듯이 이 땅엔 먼 앞날이 빛나고 있다 은풍(銀風)에 감겨진 아름다운 복지에 겨레의 긴 생명은 영원히 흘러가리.
빛나는 지역, 조선장문사, 1933
모윤숙 시인 / 샘가에 앉아
자주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잎잎이 늘어진 힘 없는 나무 그늘 여름날 황혼은 나른한 혈관 밑으로 저물어 가노니 샘가에 앉아 고달픈 하루를 쉬는 몸 저녁 하늘에 떠도는 구름과도 같아라
나무 숲에 저녁 새 소리 요란하고 수줍은 월계(月桂) 향기(香氣) 담 너머로 흘러 해 진 후 녹음(綠陰) 새엔 꿈 같은 추억이 스미노니 샘가에 앉아 옛날을 헤아리는 몸 바다에 헤엄치는 마풀과도 같아라
구름가로 휘도는 노을 파란 하늘 위에 이름 모를 꽃폭을 그려 잃었던 낭인(浪人)의 노래를 자아내나니 샘가에 앉아 노래 읊는 몸 야자수 그늘에 헤매는 집시와도 같아라.
빛나는 지역, 조선장문사,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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