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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모윤숙 시인 / 밀밭에 선 여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9.

모윤숙 시인 / 밀밭에 선 여자

 

 

수기(愁氣)에 물들지 않은

명랑한 석양

남부 고려의 한 촌락이

유(柔)한 바람에 미소한다

 

고운 발자국 소리

밭 사이에 사운사운

광우리 들린 젊음 손

보라빛 다인 밀밭 속에 사랑홉다

 

별은 어둠에 안겨

땅 저편으로 떠 오고

고개와 이랑으로 아가의 꿈같이

느즈러이 송아지는 풀을 찾는데

그 처녀의 눈은 푸른 들을 머금은 채 하늘 끝 명상에 쉰다

장미의 신이 그 얼굴에 피어나

흰 구름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는 저녁 몸을 단장할

올리브 향수를 생각지 않으리니

밤 이슬로 자라 가는 추수 나라의 여인(女人)이여

그대 세계(世界)의 모든 미녀(美女)보다 아름답고나

 

성소에서 듣는 기도의 음향을

나는 지금 그 여자(女子)의 심장에서 듣노라

늙은 회나무에 기대어

오랜 설움을 헤아리다가.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 시인 / 빛나는 지역(地域)

 

 

수만 별들이 하늘에 열리듯이

이 땅엔 먼 앞날이 빛나고 있다

은풍(銀風)에 감겨진 아름다운 복지의

우리의 긴 생명은 영원히 뻗어 가리

 

너도 나도 섞이지 않은 한 피의 줄기요

물들지 않은 조선의 자손이니

맑은 시내 햇빛 받는 언덕에

우렁찬 출발의 선언을 메고 가는 우리라네

 

포도원 넝쿨 안에 옛 노래 흩어지고

소와 말 한가로이 주인의 뒤를 따르는

사천년 황혼에 길이 떠오르는 별

휘넓은 창공 위에 무덤을 밟고 섰네

 

기려(奇麗)한 산봉우리 조용한 물줄기

오고 가는 행인의 발길을 끄으나니

명상하는 선녀처럼 고요한 산이여

너는 나의 영원한 사랑의 가슴일러라

 

위로 고른 풍우 이 땅에 영원하고

아래로 기름진 넓은 들

이 땅은 빛나라 아픔 없으라

생명도 참되거라 길이 가거라

 

수만 별들이 하늘에 열리듯이

이 땅엔 먼 앞날이 빛나고 있다

은풍(銀風)에 감겨진 아름다운 복지에

겨레의 긴 생명은 영원히 흘러가리.

 

빛나는 지역, 조선장문사, 1933

 

 


 

 

모윤숙 시인 / 샘가에 앉아

 

 

자주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잎잎이 늘어진 힘 없는 나무 그늘

여름날 황혼은 나른한 혈관 밑으로 저물어 가노니

샘가에 앉아 고달픈 하루를 쉬는 몸

저녁 하늘에 떠도는 구름과도 같아라

 

나무 숲에 저녁 새 소리 요란하고

수줍은 월계(月桂) 향기(香氣) 담 너머로 흘러

해 진 후 녹음(綠陰) 새엔 꿈 같은 추억이 스미노니

샘가에 앉아 옛날을 헤아리는 몸

바다에 헤엄치는 마풀과도 같아라

 

구름가로 휘도는 노을

파란 하늘 위에 이름 모를 꽃폭을 그려

잃었던 낭인(浪人)의 노래를 자아내나니

샘가에 앉아 노래 읊는 몸

야자수 그늘에 헤매는 집시와도 같아라.

 

빛나는 지역, 조선장문사, 1933

 

 


 

모윤숙(毛允淑) 시인 / 1910년-1990년

호는 영운(嶺雲). 1910년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자랐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35년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선과(選科)를 수료. 그뒤 월간 《삼천리(三千里)》와 중앙방송국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였고, 19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 1937년 장편 산문집 《렌의 애가》를 출간하였다.  8.15광복 뒤에는 문단과 정계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해, 1948년에는 월간문예지《문예》를 발간하는 한편, 1948·1949년에는 국제연합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1950년 대한여자청년단장, 1954년 한국펜클럽 부회장,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사 및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을 거쳐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1년 8대국회에 민주공화당 전국구 대표로 당선되었고, 이후 한국현대시인협회장(1973), 통일원 고문(1974),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1977), 문학진흥재단 이사장(1980) 등을 지냈다. 국민훈장 모란장, 예술원상, 3·1문화상 등을 받았고, 저서에는 《모윤숙 전집》《논개》《렌의 애가》 등이 있다. 196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1970), 1979년 3·1문화상을 받았고, 1991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