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시인 / 출범
기선이 떠나고 난 항구에는 끊어진 테잎들만 싱겁게 구을르고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처럼…… 바다는 다시 침묵을 쓰고 누웠다
마녀의 불길한 예언도 없었건만 건너기 어려운 바다를 사이에 두기로 했다 마지막 말을 삼키고…… 영영 떠나 보내는 마음도 실은 강하지 못했다 선조 때 이 지역은 저주를 받은 일이 있어 비극이 머리 들기 쉬운 곳이란다
검푸른 칠월의 바닷가 모랫불― 늙은 소라 껍데기 속엔 이야기 하나가 더 불었다
물을 차는 제비처럼 가벼웠으면……하나 마음의 마음은 광주리 속을 자꾸 뒤적거려 배가 나간 뒤도 부두를 떠나지 못하는 부은 맘은 바다 저편에 한여름 흰 꿈을 새우다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 시인 / 포구의 밤
마술사 같은 어둠이 꿈틀거리며 무거운 걸음새로 기어드니 찌푸린 하늘엔 별조차 안 보이고 바닷가 헤매는 물새의 울음소리 엄마 찾는 듯…… 내 애를 끓네
한가람 청풍(淸風) 물 위를 스치고 가니 기슭에 나룻배엔 등불만 조을고 사공의 노랫가락 마디마디 구슬퍼 호수같이 고요하던 마음 바다에 잔물결 이니 한때의 옛 곡조 다시 떠도네
이 바다 물결에 내 노래 띄워― 그 물결 닿는 곳마다 펼쳐나 보리 바위에 부딪치는 구원의 물 소리
내 그윽한 느낌에 눈감고 듣노니 마산포(馬山浦)의 밤은 말없이 깊어만 가는데……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 시인 / 호외
큰 불이라도 나라 폭탄 사건이라도 생겨라 외근에서 들어오는 전화가 비상(非常)하기를 바라는 젊은 편집자 그는 잔인한 인간이 아니다 저도 모르게 되어진 슬픈 기계다
그 불이 방화가 아니라 보고될 때 젊은이의 마음은 서운했다 화필이 재빠르게 미끄러진다 잠바―노타이―루바쉬카의 청년―청년― 싱싱하고 미끈한 양(樣)들이 해군복이라도 입히고 싶은 맵시다
오늘은 또 저 붓끝이 몇 사람을 찔렀느냐 젊은이 수기(手記)에 참화가 있는 날 그날은 그날은 무서운 날일지도 모른다
산호림, 자가본,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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