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수 시인 / 다리 밑
나무 다리 밑 불빛이 부우염히 달려 거적자리 위에 그림자 크다랗다.
잠자리 찾아 이리로 들렸나……
반딧불이 날고, 개울물이 도론도론 들리는 다리 밑에는 얻어 들인 저녁이 한참 갔고나.
개울 물만 화안히 트고 통 어둠에 잠겼는데 어디서 장타령 외는 소리 느렇지게 들린다.
날이 새면 다리 밑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초롱불, 삼문사, 1940
박남수 시인 / 딸에게
내 딸이 딸을 낳았다는 유월(六月) 십팔일(十八日)의 국제전화(國際電話)를 받고
네가 걸음마를 떼고, 어느 날 문지방을 넘던 모험(冒險)의 기쁨을 네 얼굴에서 보았을 때, 네 어미는 큰일이나 난 듯, 두 팔을 벌리고 부축하려고 했었지.
그 후, 너는 도랑을 뛰어 넘었고 바다를 또한 뛰어 넘었고 그 조심스런 어머니 품에서 날아 올라 지금은 뉴욕에서 딸을 낳았다.
어느 날엔가는, 너도 네 어린것이 문지방을 넘어설 때 너는 두 팔을 벌리고 어머니가 될 것이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마른 풀잎이
마른 풀잎이 하루 종일 울고 있었다. 눈이 덮인 산말령으로 고압선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입춘 대길의 문을 열고 진달래가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죽은 나무 등걸에 푸른 좁쌀이 돋고 있었다. 한랭한 가지 끝에서, 멀리를 발돋움하는 새의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무제(無題) 5
나는 회현동(會賢洞)에 있고 당신은 마석(磨石)에 있습니다. 우리는 헤어진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성북동(城北洞)에 살고 있었고 나는 명륜동(明倫洞)에 살고 있었을 때에도 우리가 헤어져 있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나는 이승에 있고 당신은 저승에 있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헤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일본에서 대학의 학생이었고 당신은 서울에서 역시 대학의 학생이었을 때에도 우리는 헤어져 있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무제(無題) 6
한동안 어느 시인(詩人)이 죽음의 연습을 하신다고 발랄한 체조(體操)를 하셨지만, 얼마간은 팔뚝에 알통도 생기기는 하셨겠지만 이 세상에는 죽고 사는 일이란 본시 없는 것. 그저 저기 돌처럼 있고 여기 꽃처럼 있을 뿐, 한 동안 지훈(芝薰)으로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고 한 동안 한직(漢稷)으로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고 한 줄의 시구(詩句)가 잠깐 피는 꽃이나 다를 바 없다. 어제에 진 한 송이 꽃이나 오늘에 핀 한 송이 꽃이나 꽃은 꽃일 뿐―언제나 꽃은 꽃일 뿐이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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