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 시인 / 오빠의 눈에
시내 밑에 작은 돌을 사뿐사뿐 밟아 가며 고기잡이 하노라고 숨 죽이던 오빠 나 주려고 딸기 따러 비탈길을 기던 오빠 그 오빠 오늘은 슬픈 눈을 가졌오
산에 올라 내 손 잡고 피리 불던 오빠 내 머리 쓰다듬고 노래하던 그 오빠 누이야! 함부로 울지 마라 부탁하시던 그 오빠의 눈동자에 안개가 끼었소
구름 낀 달빛 아래 나 혼자 걷노라면 내 어깨 꼭 잡고 숨바꼭질 하던 오빠 눈물이 귀하거니 달에 취(醉)해 우느냐던 오빠 그 오빠의 뺨 위에 설은 눈물 내리오
굳세인 오빠 내 등대이던 그 눈에 어느 누가 아픔을 주었는가 야속도 하이 물어도 대답 없는 그 슬픔을 뉘라 알까 오늘은 오빠 눈에 눈물이 가득하오.
빛나는 지역, 조선장문사, 1933
모윤숙 시인 / 옥비녀
그날 옷섶에서 가만히 내어 주신 선물 싸고 싸고 또 싸서 보드라이 감추아 두었던 옥비녀!
산뜻 눈부신 그 빛 졸음 낀 눈이 총명스레 밝아집니다 말 없는 이 비녀 어느 날 내 머리에 꽂으오리까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의 날이 오기까지 품안에 간직하라 일러 주시고 임은 육조 앞 넓은 길로 사라지셨습니다
싸우는 당파 사이로 옳음 위해 쓰러지는 청년을 일으키려 임은 불 가운데 뛰어드셨습니다
어제는 어디선가 테러당이 나타났습니다 오늘은 누가 칼로 어느 정당 수령을 죽였답니다 아아, 지금 저 종로엔 불길이 하늘을 찌르고 있지 않습니까
아가들은 방에서 무서워 떨고 색시들은 골목마다 서서 남편을 기다립니다
어디서는 반역자를 반역하자고 피 뛰는 연설을 합니다 참을 수가 없어 참을 수가 없어 선배를 매장하자 삐라를 돌립니다 순하디 순한 예의의 나라 깨끗하기 흰 꽃이라 불리우던 이 겨레에게 이 무슨 미혹의 시련입니까 그날을 창조하러 나가신 임 임은 테러의 앞잡이는 아니시겠지요 지도자를 암살하자는 모략의 수령은 아니시겠지요 임이여! 사랑하는 임이여 임은 혁명을 사랑하십니다 반역자를 미워하십니다 조선이 커지기 위해서라면 살인도 방화도 때로는 무서울 바 없습니다
그러나 임이여 반역자를 죽이기 전 자본가의 빌딩에 불을 놓기 전 먼저 조선의 생명(生命)을 살리는 길 오오 이러한 투쟁에 있나 가슴에 물어 보소서 성내어 이론을 자랑하기 전 어루만져 불쌍한 동족을 이해해 보셨나이까
이러지 않고야 임이여! 언제 약속한 그 날이 온단 말입니까
임이 주신 옥비녀 깨끗하고 맑은 마음 그 속에 살고 불 붙는 의지와 혼 그 안에 숨겼으되 조용한 선조의 넋 잃지 않습니다 진실한 조선의 맘 변함 없습니다
임이여 손잡아 서로 겸손하소서 비웃는 웅변들 자만의 애국심 비밀의 연회 우리의 앞날은 여기 있지 않습니다 오늘도 남몰래 임이 주신 옥비녀 만져 봅니다 천년(千年) 고운 이 나라의 짝 나의 옥비녀
조을던 이 마을이 임의 손에 깨는 날 나는 사뿐히 임이 주신 이 비녀를 머리에 꽂아 새날 맞이하오리다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 시인 / 유월(六月)의 밤
바람 잔 물가에 유월(六月) 나무 조용하고 풀 내음 서린 하늘에 동경(憧憬)의 궁은 멀고 또 높다
이 맘의 안개 다 거두는 저 산골짜기의 밤 향기 근심 위에 이 맘은 물결치나 내 눈은 그곳에 행복을 보네
여기는 저 항구의 파도 소리 안 들리고 소란한 생도 죽음도 없는 밤의 숲 속 새 희망의 창문이 마음 안에 열리우네
나의 집 유월(六月) 산악(山岳)에 홀로 떠 사는 별 생명의 성문도 보일 듯 보일 듯 푸른 유월(六月)은 멀고 또 높다.
옥비녀, 동백사,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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