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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모윤숙 시인 / 오빠의 눈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2.

모윤숙 시인 / 오빠의 눈에

 

 

시내 밑에 작은 돌을 사뿐사뿐 밟아 가며

고기잡이 하노라고 숨 죽이던 오빠

나 주려고 딸기 따러 비탈길을 기던 오빠

그 오빠 오늘은 슬픈 눈을 가졌오

 

산에 올라 내 손 잡고 피리 불던 오빠

내 머리 쓰다듬고 노래하던 그 오빠

누이야! 함부로 울지 마라 부탁하시던

그 오빠의 눈동자에 안개가 끼었소

 

구름 낀 달빛 아래 나 혼자 걷노라면

내 어깨 꼭 잡고 숨바꼭질 하던 오빠

눈물이 귀하거니 달에 취(醉)해 우느냐던 오빠

그 오빠의 뺨 위에 설은 눈물 내리오

 

굳세인 오빠 내 등대이던 그 눈에

어느 누가 아픔을 주었는가 야속도 하이

물어도 대답 없는 그 슬픔을 뉘라 알까

오늘은 오빠 눈에 눈물이 가득하오.

 

빛나는 지역, 조선장문사, 1933

 

 


 

 

모윤숙 시인 / 옥비녀

 

 

그날 옷섶에서

가만히 내어 주신 선물

싸고 싸고 또 싸서

보드라이 감추아 두었던

옥비녀!

 

산뜻 눈부신 그 빛

졸음 낀 눈이 총명스레 밝아집니다

말 없는 이 비녀

어느 날 내 머리에 꽂으오리까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의 날이 오기까지

품안에 간직하라 일러 주시고

임은 육조 앞 넓은 길로 사라지셨습니다

 

싸우는 당파 사이로

옳음 위해 쓰러지는 청년을 일으키려

임은 불 가운데 뛰어드셨습니다

 

어제는 어디선가 테러당이 나타났습니다

오늘은 누가 칼로 어느 정당 수령을 죽였답니다

아아, 지금 저 종로엔 불길이 하늘을 찌르고 있지 않습니까

 

아가들은 방에서 무서워 떨고

색시들은 골목마다 서서 남편을 기다립니다

 

어디서는 반역자를 반역하자고

피 뛰는 연설을 합니다

참을 수가 없어 참을 수가 없어

선배를 매장하자 삐라를 돌립니다

순하디 순한 예의의 나라

깨끗하기 흰 꽃이라 불리우던 이 겨레에게

이 무슨 미혹의 시련입니까

그날을 창조하러 나가신 임

임은 테러의 앞잡이는 아니시겠지요

지도자를 암살하자는 모략의 수령은 아니시겠지요

임이여! 사랑하는 임이여

임은 혁명을 사랑하십니다

반역자를 미워하십니다

조선이 커지기 위해서라면

살인도 방화도 때로는 무서울 바 없습니다

 

그러나 임이여

반역자를 죽이기 전

자본가의 빌딩에 불을 놓기 전

먼저 조선의 생명(生命)을 살리는 길

오오 이러한 투쟁에 있나 가슴에 물어 보소서

성내어 이론을 자랑하기 전

어루만져 불쌍한 동족을 이해해 보셨나이까

 

이러지 않고야 임이여!

언제 약속한 그 날이 온단 말입니까

 

임이 주신 옥비녀

깨끗하고 맑은 마음 그 속에 살고

불 붙는 의지와 혼 그 안에 숨겼으되

조용한 선조의 넋 잃지 않습니다

진실한 조선의 맘 변함 없습니다

 

임이여 손잡아 서로 겸손하소서

비웃는 웅변들

자만의 애국심

비밀의 연회

우리의 앞날은 여기 있지 않습니다

오늘도 남몰래

임이 주신 옥비녀 만져 봅니다

천년(千年) 고운 이 나라의 짝

나의 옥비녀

 

조을던 이 마을이 임의 손에 깨는 날

나는 사뿐히 임이 주신 이 비녀를

머리에 꽂아 새날 맞이하오리다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 시인 / 유월(六月)의 밤

 

 

바람 잔 물가에

유월(六月) 나무 조용하고

풀 내음 서린 하늘에

동경(憧憬)의 궁은 멀고 또 높다

 

이 맘의 안개 다 거두는

저 산골짜기의 밤 향기

근심 위에 이 맘은 물결치나

내 눈은 그곳에 행복을 보네

 

여기는 저 항구의 파도 소리 안 들리고

소란한 생도 죽음도 없는

밤의 숲 속

새 희망의 창문이 마음 안에 열리우네

 

나의 집 유월(六月) 산악(山岳)에

홀로 떠 사는 별

생명의 성문도 보일 듯 보일 듯

푸른 유월(六月)은 멀고 또 높다.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毛允淑) 시인 / 1910년-1990년

호는 영운(嶺雲). 1910년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자랐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35년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선과(選科)를 수료. 그뒤 월간 《삼천리(三千里)》와 중앙방송국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였고, 19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 1937년 장편 산문집 《렌의 애가》를 출간하였다.  8.15광복 뒤에는 문단과 정계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해, 1948년에는 월간문예지《문예》를 발간하는 한편, 1948·1949년에는 국제연합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1950년 대한여자청년단장, 1954년 한국펜클럽 부회장,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사 및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을 거쳐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1년 8대국회에 민주공화당 전국구 대표로 당선되었고, 이후 한국현대시인협회장(1973), 통일원 고문(1974),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1977), 문학진흥재단 이사장(1980) 등을 지냈다. 국민훈장 모란장, 예술원상, 3·1문화상 등을 받았고, 저서에는 《모윤숙 전집》《논개》《렌의 애가》 등이 있다. 196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1970), 1979년 3·1문화상을 받았고, 1991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