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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남수 시인 / 미명(未明)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2.

박남수 시인 / 미명(未明)

 

 

희멀건 그믐달이

별짜구니를 돌아 흘러 흐르면,

 

장 보러가는 나귀 옆 초롱이 흘러 따르고,

나귀 눈방울에 마을이 흘러 지나자……

 

뒷골 닭이 자즈러지게 울어

객주집 맏며느리,

뜬 눈에 대청 높은 집 마나님 꿈이 머물렀다.

 

초롱불, 삼문사, 1940

 

 


 

 

박남수 시인 / 미열(微熱)

 

 

툇마루에 떨어지는

평(坪) 가웃.

 

햇볕은 따갑고

화분의 거밋한 겨울 나무에

뾰루지 같은 것이 뾰죽 돋아난다.

 

빛을 반사하는 연두의 빛.

미열에 뜨는 눈들이

아물아물 자라는,

 

세상은 아지랑이가 뜨는

뜬 세상.

 

뜨는 메주 냄새가 매캐한

평(坪) 가웃 어둔 방에는,

 

시방 마을 어린 것들이

뾰루지의 붉은 꽃을 쓰고

구실이 한창 창궐하고 있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박남수 시인 / 밀밭의 신비(神秘)

 

 

동지(冬至)의 꼬리가

이제 조금씩 빛으로 녹아 가는

죽음 속의 삶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이 신비의 국경을, 나는

밀수꾼처럼 몰래 넘어간다.

사실 어처구니없이 비싼 값을 치르며

다시는 돌려 받을 수 없는

나머지 젊음을 담보로 하고, 나는

어두운 강을 밀항하고 있다.

저쪽의 눈밭에

파릿한 것, 꽝꽝한 흙을 제끼고

반역하듯 솟아나는 밀밭의 신비들

그 황홀한 젊음을 위하여, 나는

어두운 강을 넘어

밀수꾼처럼 지금 건너가고 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밝은 정오(正午)

 

 

어두운 북향 방에

환히 한 오리의 볕이 들어

누웠는 눈이 부시다.

벽에 걸어 논 면도용 거울의 장난.

가끔은 불의(不意)의 볕이라도 들어

어처구니없이 밝은 마음으로

더부룩히 자란 수염을 다듬어 보는

뚜우가 우는 밝은 정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박남수 시인 / 밤 1

 

 

밤은 새들을 죽이고

등불들을 죽이고

온갖 물상들을 죽인다.

새들은 어두운 숲, 나뭇가지에

그 외각(外殼)을 걸어 두고

어딘가 멀리로 날아간다.

등불은 어둠을 밝히고, 어둠이 내장한 것들을 밝히지만

스스로를 밝히지 못하여 절망한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밤 2

 

 

일몰에

보랏빛 그림자가 짤리고

자잘한 기물들은 어둠이다.

굳은 껍데기에 쌓여

스스로를 방어하는 검은 물상들.

지하에서 얼굴을 내어미는

쥐의 예리한 이빨에,

이빨에 썰리는 나무 의자는 톱 소리를 낸다.

잠들기 전,

귀만 듣는 전모.

담장 위를 쥐가 달빛을 지고

조르르 건너간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朴南秀) 시인(1918.5.3-1994.9.17)

평양 출생. 숭실상고를 거쳐 1941년 일본 주오(中央)대학을 졸업. 초기에는 자연적 서경과 서정 속에서 절박한 감정을 은유적으로 환기하는 시를 썼으며, 후기에는 존재성을 규명하려는 주지적 경향을 가졌다.  유학 시절 제1회 <문장>지의 추천을 받은 김종한, 이용악 등과 사귀게 되면서, 그들의 권유로 <문장>지에 투고하였는데,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정지용에게 추천됨.  1940년에 첫 시집인 <초롱불>을 낸 이후 "갈매기 소묘" "새의 암장(暗葬)" 등 정갈하면서도 의식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시를 써 왔다. 미국에서 지낸 이국 생활의 외로움을 그린 <그리고 그 이후>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함. 1957년에는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장만영 등과 함께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했으며, 아시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1994년 6월에는 조국 통일에의 절실한 심경을 노래한 시 "꿈의 물감"으로 서울신문사가 제정한 공초(空超)문학상(제 2

회)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