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시인 / 결투(決鬪)의 거북
입으로 비수를 받겠다.
천만 개 별과 별이 칼날이 되어 쏟아져도, 엎드려 푸른 등 등으로 모조리 맞받겠다.
금으로 번쩍이는 내 가슴 한복판의 임금 왕자, 찔리면 피 흐르는 가슴팍 그대로 맞받겠다.
그 비수를 받아 네게로 다시 뿌리겠다.
하늘로 윙윙대며 바람을 끊고 날아가는 내리 꽂는 칼날들의 풋풋한 전율.
단 한 개 한 개씩만으로 너의 급소와 급소를 노려,
오만한 힘의 근원 근원을 모조리 지질르겠다.
새로 펄펄 나부끼는 해와 달은 내 것, 일어서서 일제히 바다들이 환호하고,
푸른 내 등의 껍질 아침 출렁임, 쏟아지는 햇살을 심해를 갈고 가며,
하나씩의 하늘마다 손 흔들겠다. 스스로 내 피의 상처 아물리겠다.
속 수석열전(續水石列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고독(孤獨)의 강(江)
빛에서 피가 흐르는 강(江) 고독(孤獨)이 띄우는 찬란한 꽃불은 밤이다.
짐승과 짐승들이 일으키는 내일의 종말(終末)을 위한 끊임없는 교역(交易), 도마 위 푸른 칼 앞에 움직일 수도 없이 눕는 평화(平和)와 자유(自由)여.
오랜 앞날에 오늘의 밤을 증언(證言)할 고양이의 불붙은 눈과 목으로 토(吐)하는 가마귀의 피 기록(記錄).
바람이 술이 되고 햇볕이 눈물이 되고 저승과 이승을 위한 늙으신 주례(主禮)는 지금 침묵(沈黙).
무덤과 혼례(婚禮)를 장식할 최후(最後)의 꽃다발은 이미 짓밟힌 절망(絶望)의 진눈깨비.
잘 길들은 식민지(植民地)의 지성(知性)이 선량(善良)해서 밤이 편쿠나.
펄럭이던 깃발의 신호(信號)가 내려지자 구름과 바람마저 반란(叛亂)하는 벌판,
비둘기가 그 짝의 이름을 외우다 쓰러져 간 고독(孤獨)한 강(江)가에,
늙은 눈먼 청동(靑銅)말 하나 먼 노을을 향해 떨면서 울음 운다.
인간밀림(人間密林), 일조각, 1963
박두진 시인 / 고산식물(高山植物)
아슬히 깎아질린 벼랑에 산다. 내 가슴 이 비수(匕首)는 자라 오르는 난(蘭) 짙은 안개 비에 서려 바람에 떤다. 찬 달빛 거울 비치면 맹금(猛禽)의 상한 죽지 언덕을 밀물 덮던 현란한 기폭 포효(咆哮)가 지금은 꽃으로 떨어져 말이 없는 그 침묵 심연(深淵) 이쪽 벼랑에 산다. 언젠가는 다시 불을 하늘 아침 폭풍(暴風) 땅에는 동남(東南) 서북(西北) 혁명(革命) 치달려 비수(匕首)가 그 사슬을 그물을 그 밤을 찔러 마지막 빛의 개벽 꽃 흐트러뜨릴 난(蘭)이여 안개 떠는 벼랑에 산다.
自苑캣 高山植物),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광장(廣場)
뜨거운 침묵의 햇살이 쌓이고, 바람은 보고 온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는다. 젊음이 달리던 함성의 파동 열기를 뿜었던 흔적의 피를 증발하며, 다만 파랗게 몰고 올 바다의 개벽 이념의 별들의 신선한 폭주를 기다리며, 증언의 푸른 나무 정정한 수목들에 둘리워 하얗게 끓고 있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3
박두진 시인 / 금강전도(金剛全圖)
밤에도 낮에도 별이 펑펑 쏟아지고,
달이 열 개 해가 열 개 높게높게 걸려 있고,
억억만 동해 파도 하얗게 밀고 오고,
금사다리 은사다리 일만이천 별사다리,
찰박이던 달의 폭포 달의 골짝 거기,
육천만 가슴 속 이 저마다의 눈멀음,
응어리 안의 넋이 불로 활활 탄다.
아으, 서로 얽힌 넋의 사슬 끊을 수가 없다.
넋 철철 피로 솟아 강산 적신다.
갈수록 더 골짝마다 맹수의 떼 들끓고,
하늘 아래 제일강산 검은 먹구름.
언제나 그 자유 천지 하나의 날 그때일지,
온 산을 다 뭉개도 못 다스릴 이 아픔,
일만이천 주룩주룩 서서 너는 운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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