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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두진 시인 / 결투(決鬪)의 거북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2.

박두진 시인 / 결투(決鬪)의 거북

 

 

입으로 비수를 받겠다.

 

천만 개 별과 별이 칼날이 되어

쏟아져도,

엎드려 푸른 등

등으로 모조리 맞받겠다.

 

금으로 번쩍이는

내 가슴 한복판의 임금 왕자,

찔리면 피 흐르는

가슴팍 그대로 맞받겠다.

 

그 비수를 받아

네게로 다시 뿌리겠다.

 

하늘로 윙윙대며

바람을 끊고 날아가는

내리 꽂는 칼날들의

풋풋한 전율.

 

단 한 개

한 개씩만으로

너의 급소와 급소를

노려,

 

오만한 힘의 근원

근원을 모조리 지질르겠다.

 

새로 펄펄 나부끼는

해와 달은 내 것,

일어서서 일제히

바다들이 환호하고,

 

푸른 내 등의 껍질

아침 출렁임,

쏟아지는 햇살을

심해를 갈고 가며,

 

하나씩의 하늘마다 손 흔들겠다.

스스로 내 피의 상처

아물리겠다.

 

속 수석열전(續水石列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고독(孤獨)의 강(江)

 

 

빛에서 피가 흐르는

강(江)

고독(孤獨)이 띄우는

찬란한 꽃불은

밤이다.

 

짐승과 짐승들이 일으키는

내일의 종말(終末)을 위한

끊임없는

교역(交易),

도마 위

푸른 칼 앞에

움직일 수도 없이 눕는

평화(平和)와 자유(自由)여.

 

오랜 앞날에

오늘의 밤을 증언(證言)할

고양이의

불붙은 눈과

목으로 토(吐)하는

가마귀의

피 기록(記錄).

 

바람이 술이 되고

햇볕이

눈물이 되고

저승과 이승을 위한

늙으신 주례(主禮)는

지금 침묵(沈黙).

 

무덤과 혼례(婚禮)를 장식할

최후(最後)의 꽃다발은

이미 짓밟힌

절망(絶望)의 진눈깨비.

 

잘 길들은

식민지(植民地)의 지성(知性)이 선량(善良)해서

밤이 편쿠나.

 

펄럭이던

깃발의 신호(信號)가 내려지자

구름과

바람마저 반란(叛亂)하는

벌판,

 

비둘기가

그 짝의 이름을 외우다

쓰러져 간

고독(孤獨)한 강(江)가에,

 

늙은 눈먼 청동(靑銅)말 하나

먼 노을을 향해

떨면서 울음 운다.

 

인간밀림(人間密林), 일조각, 1963

 

 


 

 

박두진 시인 / 고산식물(高山植物)

 

 

아슬히 깎아질린 벼랑에 산다.

내 가슴 이 비수(匕首)는 자라 오르는 난(蘭)

짙은 안개 비에 서려 바람에 떤다.

찬 달빛 거울 비치면 맹금(猛禽)의 상한 죽지

언덕을 밀물 덮던 현란한 기폭

포효(咆哮)가 지금은 꽃으로 떨어져 말이 없는

그 침묵 심연(深淵) 이쪽 벼랑에 산다.

언젠가는 다시 불을 하늘 아침 폭풍(暴風)

땅에는 동남(東南) 서북(西北) 혁명(革命) 치달려

비수(匕首)가 그 사슬을 그물을 그 밤을 찔러

마지막 빛의 개벽 꽃 흐트러뜨릴

난(蘭)이여 안개 떠는 벼랑에 산다.

 

自苑캣 高山植物),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광장(廣場)

 

 

뜨거운 침묵의 햇살이 쌓이고,

바람은 보고 온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는다.

젊음이 달리던 함성의 파동

열기를 뿜었던 흔적의 피를

증발하며,

다만

파랗게 몰고 올 바다의 개벽

이념의 별들의 신선한 폭주를 기다리며,

증언의 푸른 나무

정정한 수목들에 둘리워

하얗게 끓고 있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3

 

 


 

 

박두진 시인 / 금강전도(金剛全圖)

 

 

밤에도 낮에도 별이 펑펑 쏟아지고,

 

달이 열 개 해가 열 개 높게높게 걸려 있고,

 

억억만 동해 파도 하얗게 밀고 오고,

 

금사다리 은사다리 일만이천 별사다리,

 

찰박이던 달의 폭포 달의 골짝 거기,

 

육천만 가슴 속 이 저마다의 눈멀음,

 

응어리 안의 넋이 불로 활활 탄다.

 

아으, 서로 얽힌 넋의 사슬 끊을 수가 없다.

 

넋 철철 피로 솟아 강산 적신다.

 

갈수록 더 골짝마다 맹수의 떼 들끓고,

 

하늘 아래 제일강산 검은 먹구름.

 

언제나 그 자유 천지 하나의 날 그때일지,

 

온 산을 다 뭉개도 못 다스릴 이 아픔,

 

일만이천 주룩주룩 서서 너는 운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4

 

 


 

박두진[朴斗鎭, 1916.3.10 ~ 1998.9.16] 시인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誌를 통해 등단.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3인 합동시집 『靑鹿集(청록집)』(을유문화사, 1946)을 간행한 뒤 첫 개인시집 『해』를 출간. 이후 『오도』, 『거미와 성좌』, 『인간밀림』, 『고산식물』, 『사도행전』, 『수석열전』, 『속 수석열전』, 『야생대』, 『포옹무한』, 『빙벽을 깬다』 등의 시집과 시론집 『시와 사랑』, 『한국현대시론』 등을 간행. 3.1문화상 예술상, 인촌상, 지용문학상, 외솔문학상, 동북아기독문학상 등을 수상. 연세대에서 정년퇴임 후 단국대와 추계예대에서 후학 양성. 1998년에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