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수 시인 / 미명(未明)
희멀건 그믐달이 별짜구니를 돌아 흘러 흐르면,
장 보러가는 나귀 옆 초롱이 흘러 따르고, 나귀 눈방울에 마을이 흘러 지나자……
뒷골 닭이 자즈러지게 울어 객주집 맏며느리, 뜬 눈에 대청 높은 집 마나님 꿈이 머물렀다.
초롱불, 삼문사, 1940
박남수 시인 / 미열(微熱)
툇마루에 떨어지는 평(坪) 가웃.
햇볕은 따갑고 화분의 거밋한 겨울 나무에 뾰루지 같은 것이 뾰죽 돋아난다.
빛을 반사하는 연두의 빛. 미열에 뜨는 눈들이 아물아물 자라는,
세상은 아지랑이가 뜨는 뜬 세상.
뜨는 메주 냄새가 매캐한 평(坪) 가웃 어둔 방에는,
시방 마을 어린 것들이 뾰루지의 붉은 꽃을 쓰고 구실이 한창 창궐하고 있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박남수 시인 / 밀밭의 신비(神秘)
동지(冬至)의 꼬리가 이제 조금씩 빛으로 녹아 가는 죽음 속의 삶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이 신비의 국경을, 나는 밀수꾼처럼 몰래 넘어간다. 사실 어처구니없이 비싼 값을 치르며 다시는 돌려 받을 수 없는 나머지 젊음을 담보로 하고, 나는 어두운 강을 밀항하고 있다. 저쪽의 눈밭에 파릿한 것, 꽝꽝한 흙을 제끼고 반역하듯 솟아나는 밀밭의 신비들 그 황홀한 젊음을 위하여, 나는 어두운 강을 넘어 밀수꾼처럼 지금 건너가고 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밝은 정오(正午)
어두운 북향 방에 환히 한 오리의 볕이 들어 누웠는 눈이 부시다. 벽에 걸어 논 면도용 거울의 장난. 가끔은 불의(不意)의 볕이라도 들어 어처구니없이 밝은 마음으로 더부룩히 자란 수염을 다듬어 보는 뚜우가 우는 밝은 정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박남수 시인 / 밤 1
밤은 새들을 죽이고 등불들을 죽이고 온갖 물상들을 죽인다. 새들은 어두운 숲, 나뭇가지에 그 외각(外殼)을 걸어 두고 어딘가 멀리로 날아간다. 등불은 어둠을 밝히고, 어둠이 내장한 것들을 밝히지만 스스로를 밝히지 못하여 절망한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밤 2
일몰에 보랏빛 그림자가 짤리고 자잘한 기물들은 어둠이다. 굳은 껍데기에 쌓여 스스로를 방어하는 검은 물상들. 지하에서 얼굴을 내어미는 쥐의 예리한 이빨에, 이빨에 썰리는 나무 의자는 톱 소리를 낸다. 잠들기 전, 귀만 듣는 전모. 담장 위를 쥐가 달빛을 지고 조르르 건너간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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