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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모윤숙 시인 / 유월 아침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3.

모윤숙 시인 / 유월 아침

 

 

보리밭 넘어 온 유월(六月) 아침은

우리집 헌 바자에 웃고 머뭅니다

남빛 나팔꽃 돌담에서 잠 깨어

회조조 이슬에 맑은 세수하노라

 

새빨간 적삼에 물동이 이고

돌각담 돌아서는 앞집 새아씨

오늘 아침 어느 골의 손님 오셨나

수줍은 물 바가지 동당동당하노나

 

고불거린 작은 산길에

호박국에 오똑 솟은 조밥이고

이슬에 대일세라 치마꼬리 휘감으며

남편 찾아 논길에 종종걸음 바빠라

 

안개에 휘감긴 먼 산은 양의 빛으로 하얗고

숨차 흐르는 바윗골 산 냇 소리

유월의 아침은 처녀의 꿈처럼 수줍어라

유월 아침은 내 마음 위에 한가히 누워 가노나.

 

빛나는 지역, 조선장문사, 1933

 

 


 

 

모윤숙 시인 / 즐겨 부르던 내 노래야

 

 

연두빛이었습니다

내가 기대어 지절대던 그 느티나무는

머리 끝에 팔랑거리는 댕기가

바람에 못견디어 허리에 되감기던 때

나는 도톨밤이랑 까 먹으며

무슨 노랜지 그저 불렀습니다

 

맵싸한 촌마을의 저녁 연기

파란 잎사귀에 가물가물 피어 오를 무렵

나는 그 연기를 쏘이면서도

누구를 위해선지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음 가는 대로 소리 나는 대로

바람 속에서 구름 뒤를 따르며

즐거워 희망(希望)을 노래했습니다

 

내 머리서 빨간 댕기 가버린지

벌써 까마득한 옛날

나는 그 때에 지절대던 소리를

더듬어 더듬어 옛 길로 갑니다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곡조였어요

그저 어디선가 기다리는 시절(時節)이

눈과 귀에 향내를 퍼부어 내리기

한없이 한없이 따라 올라가

무슨 노랜지 그렇게 불렀답니다

 

이만치 커진 나이엔

그 황홀한 희망에 안기려니 하고

이 나이를 애써 기다리며 노래했어요

 

이제 그 나이에 왔습니다

가까울 듯 속삭이던 그 희망은

지금 내 귀에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 연두빛 느티 잎새 밑

빨간 댕기 끝에서 오던 소리는.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 시인 / 침묵(沈黙)

 

 

사모(思慕)는 그늘을 입고 잠들어

시체처럼 잠 속에 파묻히다

바람이 불어와 언덕의 풀이 흩어지고

큰 하늘의 번개가 여기 흔들려도

그는 이제 깨지 않는다.

 

높은 가지 위에

오늘 밤도 먼 기쁨이 나타나서

흰 꽃 검은 꽃을 뿌려 준다

그 속에 형용(形容)하는

슬픈 마음짓의 가지가지를

세상(世上)에 또 없을 보석처럼

싸고 또 싸서 맘의 천국(天國)을 이루노라.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毛允淑) 시인 / 1910년-1990년

호는 영운(嶺雲). 1910년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자랐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35년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선과(選科)를 수료. 그뒤 월간 《삼천리(三千里)》와 중앙방송국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였고, 19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 1937년 장편 산문집 《렌의 애가》를 출간하였다.  8.15광복 뒤에는 문단과 정계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해, 1948년에는 월간문예지《문예》를 발간하는 한편, 1948·1949년에는 국제연합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1950년 대한여자청년단장, 1954년 한국펜클럽 부회장,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사 및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을 거쳐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1년 8대국회에 민주공화당 전국구 대표로 당선되었고, 이후 한국현대시인협회장(1973), 통일원 고문(1974),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1977), 문학진흥재단 이사장(1980) 등을 지냈다. 국민훈장 모란장, 예술원상, 3·1문화상 등을 받았고, 저서에는 《모윤숙 전집》《논개》《렌의 애가》 등이 있다. 196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1970), 1979년 3·1문화상을 받았고, 1991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