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 시인 / 유월 아침
보리밭 넘어 온 유월(六月) 아침은 우리집 헌 바자에 웃고 머뭅니다 남빛 나팔꽃 돌담에서 잠 깨어 회조조 이슬에 맑은 세수하노라
새빨간 적삼에 물동이 이고 돌각담 돌아서는 앞집 새아씨 오늘 아침 어느 골의 손님 오셨나 수줍은 물 바가지 동당동당하노나
고불거린 작은 산길에 호박국에 오똑 솟은 조밥이고 이슬에 대일세라 치마꼬리 휘감으며 남편 찾아 논길에 종종걸음 바빠라
안개에 휘감긴 먼 산은 양의 빛으로 하얗고 숨차 흐르는 바윗골 산 냇 소리 유월의 아침은 처녀의 꿈처럼 수줍어라 유월 아침은 내 마음 위에 한가히 누워 가노나.
빛나는 지역, 조선장문사, 1933
모윤숙 시인 / 즐겨 부르던 내 노래야
연두빛이었습니다 내가 기대어 지절대던 그 느티나무는 머리 끝에 팔랑거리는 댕기가 바람에 못견디어 허리에 되감기던 때 나는 도톨밤이랑 까 먹으며 무슨 노랜지 그저 불렀습니다
맵싸한 촌마을의 저녁 연기 파란 잎사귀에 가물가물 피어 오를 무렵 나는 그 연기를 쏘이면서도 누구를 위해선지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음 가는 대로 소리 나는 대로 바람 속에서 구름 뒤를 따르며 즐거워 희망(希望)을 노래했습니다
내 머리서 빨간 댕기 가버린지 벌써 까마득한 옛날 나는 그 때에 지절대던 소리를 더듬어 더듬어 옛 길로 갑니다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곡조였어요 그저 어디선가 기다리는 시절(時節)이 눈과 귀에 향내를 퍼부어 내리기 한없이 한없이 따라 올라가 무슨 노랜지 그렇게 불렀답니다
이만치 커진 나이엔 그 황홀한 희망에 안기려니 하고 이 나이를 애써 기다리며 노래했어요
이제 그 나이에 왔습니다 가까울 듯 속삭이던 그 희망은 지금 내 귀에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 연두빛 느티 잎새 밑 빨간 댕기 끝에서 오던 소리는.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 시인 / 침묵(沈黙)
사모(思慕)는 그늘을 입고 잠들어 시체처럼 잠 속에 파묻히다 바람이 불어와 언덕의 풀이 흩어지고 큰 하늘의 번개가 여기 흔들려도 그는 이제 깨지 않는다.
높은 가지 위에 오늘 밤도 먼 기쁨이 나타나서 흰 꽃 검은 꽃을 뿌려 준다 그 속에 형용(形容)하는 슬픈 마음짓의 가지가지를 세상(世上)에 또 없을 보석처럼 싸고 또 싸서 맘의 천국(天國)을 이루노라.
옥비녀, 동백사, 1947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두진 시인 / 기(旗) 외 4편 (0) | 2020.01.23 |
---|---|
박남수 시인 / 밤비 외 3편 (0) | 2020.01.23 |
박두진 시인 / 결투(決鬪)의 거북 외 4편 (0) | 2020.01.22 |
박남수 시인 / 미명(未明) 외 5편 (0) | 2020.01.22 |
모윤숙 시인 / 오빠의 눈에 외 2편 (0) | 2020.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