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수 시인 / 밤비
하늘이 짖는다. 저 노(怒)한 목소리는 죄 지은 자의 머리 위에서 터지고, 분노의 눈빛은 세상을 쏘아보며 어두운 소나기가 한밤내 쏟아진다. 반짝이던 보석(寶石)을 거둬 들이고, 지금 신(神)의 숨소리는 거칠기만 하다. 돌아선 처용(處容)처럼 용서하지 말라. 돌이 젖고, 꽃이 젖고 인간(人間)도 젖는, 낮은 숨결이 한밤이 새도록 빗풍을 한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병동(病棟)의 긴 복도
1
병동의 긴 복도에는 걸을 때마다 크레졸의 기류가 흔들린다.
코오너를 돌아서는 흰 천사의 손에는 성기 같은 주사기가 바늘을 뽑고 있다.
나는 눈을 꿰어 등으로 내어밀은 주삿바늘에 꼼짝없이 박제가 되었다.
간호부는 부드럽게 웃음의 파동을 건네고 지나간다.
2
복도를 향한 유리창 앞에는 유리 상자 안에서 아물거리는 조산아의 밥풀 같은 꼬투리가 푸들거릴 때마다 웃음이 터지는 일군(一群)의 아낙네들의 거침없는 웃음.
일군(一群)의 아낙네들의 거침없는 웃음에 거북한 눈을 돌려, 창 밖의 병원 뒷문으로 살그머니 숨어서 빠져나가는 영구차를 본다.
3
병동의 긴 복도에는 걸을 때마다 크레졸의 기류가 흔들린다. 코오너를 돌아 것차(車)를 밀며 창백한 간호부가 조객처럼 천천히 따라온다. 망가진 육신에 바치는 마지막 경의.
목례를 하며, 상부처럼 따라간 흰 나비의 잔상이 지워지지 않는 병동의 긴 복도.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봄비
봄비가 내린다. 나의 구부정한 척추가 조금 선다.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는 간지러운 속삭임. 언젠가 나의 귀에도 있었던 사랑의 말씀이다.
구부정한 척추를 세우고 나도 육신에 꽃이나 더덕히 달아 볼까.
진종일, 봄비는 꽃에 내려 맺혀, 붉게 흔들리고 잎에 내려 푸르게 흔들린다.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을까요)
지금, 꽃밭에는 한창 공사하는 소리가 들린다.
땅에 묻히듯, 나도 방바닥에 누워서 기다리고 있다. 무료한 시간에 가녀린 뿌리가 돋아나듯 내 턱이 가렵더니 더부룩한 것이 돋아나고 있다. 진종일, 봄비는 공사하는 소리를 그치지 않는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부락(部落)
온천(溫泉)을 둘러 쌓고 마을이 생긴 날……
망아지 울던 벌에 신파(新派)쟁이 트럼펫이 가을 바람을 실어 왔다.
앓는 이는 앓는 이끼리 창부(娼婦)는 창부끼리
벌 위에 진(陣) 친 천막(天幕)이 고운 이야기였다.
온천만 호올로 솟아 흐를 동안,
마을은 병들지 않은 사람을 찾아 옛날 추억에 십전(十錢) 백동화(白銅貨)를 놓고 왔다.
그후 며칠도 천막은 불려 가지 않았다.
초롱불, 삼문사,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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