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시인 / 기(旗)
기(旗)! 그것은,―
찬란하게, 우리 앞에 나부끼어야 한다. 바람결 띠끌마다 흐려져 온 것, 미쳐 뛰는 물결마다 휩쓸려 온 것, 아우성의 저자마다 찢겨져 온 것,
그것은,― 어쩌면 핏빛, 어쩌면 별빛, 어쩌면 초록, 어쩌면 눈물, 어쩌면 꿈! 어쩌면 활활 타는 불꽃 빛으로, 가슴마다 살아 있어 나부끼는 것,
펄펄펄펄 창궁(蒼穹) 위에 펼쳐 오르면, 저마다의 기(旗)폭들이, 아득하게 한 폭으로 피어 살아 오르면, 우리들의 눈은 다시 부시어져 온다. 가슴들이 둥둥 새로 틔어 부퍼 온다. 피가 더욱 새로 맑아 펄덕여져 온다.
기(旗)! 다시 오른 기(旗)폭은 찢겨지지 않는다. 펄펄펄펄 기(旗)폭에서 빛발들이 흩는다. 펄펄펄펄 기(旗)폭에서 꽃가루가 흩는다. 기(旗)을 향(向)해 우리들은 행진(行進)을 한다. 파다아하게 모여들어 새로 뽑는 합창(合唱).―손뼉들을 흠뻑 친다. 하얀 새를 날린다. 눈빛 같은 하얀 새뗄 파닥파닥 날린다.
기(旗)! 그것은,― 우리들 젊은, 우리들 뛰는, 가슴마다 당신께서 주신 것이다. 기(旗)! 그것은,― 기적(奇蹟)처럼 찬란하게, 당신께서 우리 앞에 날리셔야 한다.
오도(午禱), 영웅출판사, 1954
박두진 시인 / 꽃과 항구(港口)
나무는 철을 따라 가지마다 난만히 꽃을 피워 흩날리고,
인간은 영혼의 뿌리 깊이 눌리면 타오르는 자유의 불꽃을 간직한다.
꽃은 그 뿌리에 근원하여 한 철 바람에 향기로이 나부끼고,
자유는 피와 생명에 뿌리하여 영혼의 밑바닥 꺼지지 않는 근원에서 죽지 않고 탄다.
꽃잎. 꽃잎. 봄 되어 하늘에 구름처럼 일더니, 그 바다―, 꽃그늘에 항구는 졸고 있더니,
자유여! 학살되어 바닷속에 버림받은 자유여! 피안개에 그므는 아름다운 항구여!
그 소녀와 소년들과 젊음 속에 맥 뛰는 불의와 강압과 총칼 앞에 맞서는
살아서 누리려는 자유에의 비원이 죽음―. 생명을 짓누르는 공포보다 강하구나.
피는 꽃보다 값지고, 자유에의 불꽃은 죽음보다 강하구나.
거미와 성좌(星座), 대한기독교서회, 1962
박두진 시인 / 꽃들의 행렬
현란한 꿈의 무지개도 아침 바닷소리의 싱싱한 설레임도 새들의 낭랑한 지저귐도 생각하는 나무의 푸른 그림자도 지금은 없네. 뜨거운 햇살의 입맞춤도 바람의 부드러운 포옹도 유유한 구름의 손짓도 거윽한 별들의 속삭임도 지금은 없네. 꿈의 자락 갈래져 찢기우고 새들은 침묵하고 생각하는 나무의 잎새들 조락하고 햇살은 핏빛 전율 바람은 발광 구름들 스스로 분노로 불이 일어 어둠에 피 묻히는 꽃들의 저 행렬 안으로 무너지며 밤에 쌓이는 그 강가 가시벌의 꽃대열이어 내일에의 꽃의 절규 푸드득거림이어.
사도행전(使徒行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너의 융기(隆起)
어떻게 너에게 닿을까 가슴이어.
천만년 또는 천만리 멀고 멀은 계곡을 불어 치는 윙윙한 하늘 바람,
한 떼씩의 바다가 일어서려다 주저앉고 치달리며 피 흐르는 산맥들의 발목 지금은 적막한 절름대는 광야의 상한 짐승이어.
너에의 달디 달은 유혹은 꿈의 늪 체념은 느린 죽음 육신은 마른 흙 바다보다 더 설레는 안의 바람 속 춤추는 이 회오리 마음 어지러움이어.
그 죽어도 다시 살을 오직 하나 불씨 서로 보며 불 튀는 눈과 눈의 영원 포옹이 그 육신으로 영으로 푸득거릴,
어떻게 너에게 닿을까 사랑이어.
속 수석열전(續水石列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달과 이리
이리는 이리 정신, 왜 이리로 태어났나 스스로는 모른다. 축축한 어스름 때 달이 걸린 새벽을 싸다니며, 왜 피의 냄새, 피의 맛, 살의 맛에 미치는지 스스로는 모른다. 심술로 약한 자를 덮치고, 성나서 물어 뜯고, 턱주가리 달을 향해 꺼으꺼으 운다. 제 서슬에 피가 더우면 십리 백리 뛴다. 먼 먼 피의 향수, 달이 걸린 삘딩숲을 벌룸벌룸 뛴다. 활활 눈에 불을 켜고 옛날 향수 취한다. 휜 이빨 달을 향해 꺼으꺼으 운다.
야생대(野生代), 일조각, 1977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남수 시인 / 비가(悲歌) 외 2편 (0) | 2020.01.24 |
---|---|
모윤숙 시인 / 화랑(花郞) (0) | 2020.01.24 |
박남수 시인 / 밤비 외 3편 (0) | 2020.01.23 |
모윤숙 시인 / 유월 아침 외 2편 (0) | 2020.01.23 |
박두진 시인 / 결투(決鬪)의 거북 외 4편 (0) | 2020.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