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수 시인 / 비가(悲歌)
1
나의 눈에는 넓은 원야(原野)의 그림자가 있다. 한 무리의 새가 건너가며 굽어본 넓은 원야(原野)의 그림자가 있다. 싸락눈이 치는 넓은 원야(原野)를 철새가 무리져 이동해 가면서 아픈 마음의 상흔을 피로 뿌린 흰 눈발의 혈흔들.
195×년 12월 날아가는 공중의 새들은 한 걸음 뒷걸음치는 지평선을 날아가도 지워지지 않는 지평선을 바보, 바보, 바보처럼.
포탄이 터지는 터널을 뚫으며 우리가 찾아가는 길은, 꿀이 솟는 복지를 찾아서가 아니라 귓맛 좋은 자유를 찾아서가 아니라 찢어진 절규처럼 찢어진 기폭처럼. 그것은 삶의 무늬, 머리에 흰 붕대를 감고 온 고통을 앓던 Z씨의 감금은 한 민족의 투옥. 창살 밖에는 외국군대의 보초병의 군화 소리가 언 당을 가르며 저벅거렸고,
195×년 12월, 나의 최초의 탈출은 넓은 하늘을 날아오르는 승천. 민족이란 말의 뜻을 되새기며 되새기며 남하하였지 그것은 삶의 무늬.
2
그것은 삶의 무늬. 부러진 쭉지를 너펄거리며 백결의 해어진 의관을 쓰고 신의 군대처럼 다열종대로 서울에 입성하였지. 동정의 눈화살을 받으며.
―워커 장군의 죽음. 호외의 놋방울이 울리는 가두에 서서 아직도 동․서․남․북 어디도 갈 길은 없었다. 깨어진 서울 거리에 서서, 나는 넓은 원야(原野)의 그림자를 보며 자유로이 나는 무리 새의 행방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늘은 흐르고 찬 삭풍의 매운 칼날은 우리의 살결을 갈랐지만, 넓은 하늘이 저렇게 펄쳐져 있으면 날개를 띄울 공간으론 충분하지 않겠는가.
3
쫓기듯 쫓기는 듯 밀리어간 부산항에 닻을 내리고, 헌데처럼 딱지 앉은 판자촌에서 어린것들은 연한 손톱이 짜개지도록 넓은 원야(原野)의 그림자를 캐고 있었다 고 파릿한 것을 꽝꽝 언 얼음 속의 새봄을 후비고 있었다.
그것은 삶의 발견. 어린것들은 손톱이 짜개져 몇 점, 뿌려진 핏방울을 굽어보며 이것이 언젠가는 꽃 필 것을 어린 눈동자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4
부두(埠頭)를 나는 배고픈 갈매기들. 기름 위에 뜬 밥풀을 쪼아올리며 ―이거 정말 못 살갔쉐다가레. ―므스거 그 따위 마르 하지비. 늙은 갈매기는 수척한 목소리로 서로를 위무하며 하역장에서 얌생이를 치고 있었지. 어디선가 들리는 확성기는 ―켓세라, 켓세라. 신의 음성처럼 고귀한 격려를 보내고 있었다.
―켓세라, 켓세라. 살결 고운 한국의 계집애들은 기름 위에 뜬 밥풀을 쪼으려 몰려들었고, 보이지 않은 투망에 걸리어 성성한 비늘이 번득이고 있었지.
좁은 한 칸 방, 아랫목에서 건장한 미스터 콜리는 애완용 강아지를 덮치고 부엌에서는 그 에미가 깡통을 뜯어 술상을 만들고 있었다.
암담한 언어의 장벽은 날로 그 부피를 더하는 역사 속에서 배고픈 갈매기들은 오직 바다 위를 날면서 밥풀을 쪼아먹는 일만이 사는 이유의 전부였다.
5
켓세라, 켓세라. 파도는 노하여 머리를 들고 골목마다 흩어진 주먹에 멍들은 얼굴에는 아무런 신분증도 없었다. ―이 새끼, 코피루 세수를 해야 알겠니. 후들거리는 다리로는 무거운 머리를 세울 수도 없는 거리의 북. 그래도…… 좀 기술적으로 말하면, 내일을 믿으며, 믿어보며 돌아가는 판자촌. 서른넷의 젊은 시인은 광복동 네거리에서 갈 곳이 없다. 아무데도 시는 없었다.
6
만나는 옛 친구는 히죽이 흰 이빨을 내어밀고 웃으며 슬금슬금 꽁무니를 내뺏지. ―저 친구도 도강을 못했다던가. 오히려 내 편에서 동정하며 소금 같은 쓴 가래를 삼켰다.
뒷짐을 지고 하릴없이 도떼기시장으로 가면, 피난 친구들이 물들인 군복의 허수아비가 되어 깡통 장수, 헌옷 장수, 꿀꿀이 장수가 다 된 친구들이 히죽이 흰 이빨을 내어밀고 웃으며 ―아직 점심 전이지? 코뼈가 시큰둥하게 울리는 38따라지의 뜨거운 정분을 느꼈지.
친구의 품 좁은 웃도리를 얻어 입고 늘 떳떳치 못한, 나는 갈 곳이 없다. 부두(埠頭)에 앉아서 두보처럼 울었다. 갈매기의 끼룩거리는 노래가 바다보다 세차게 일렁이는 가슴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느 영화관에서 울리는 유행가는 ―사나이는 도둑, 사나이는 도둑 이 판에도 그런 감상이 있었던가 영도까지 울리게 처음으로 큰 웃음을 웃어 보았다.
7
저무는 햇빛은 피를 뱉고 수평에 꺼져 내리는 해질녘 비로소 현실인 처자가 있는 판자촌으로 간다. 어둠 속을 누비며 갈매기도 하나 둘 사라져 간다.
도도하게 살리라던, 나는 어둠 속에서 점점점 작아져 지금은 풀섶을 기는 버러지가 된다. 버러지만큼의 주장도 내세우지 못하는 제 주제를 내려다보며 195×년 춘삼월, 가장 작아진 육신이 왜 이렇게 무거우냐.
수척한 얼굴에 날로 커지는 눈방울은 잠자리처럼 복안(複眼)의 어지러운 시력이 되어 지금 나는 넓은 원야(原野)의 그림자를 본다.
한 무리의 새가 건너가며 굽어본 넓은 원야(原野)의 그림자를 본다. 찢어진 절규처럼 찢어진 기폭처럼.
8
경상도 사투리가 ―어서 오이소야 환영하는 곳은 밥집뿐이지만, 누가 불러서 왔던가. 나두 북에 가면 고래등 같은 집두 있구요 쩡쩡 울리는 한 푸내기가 살구 있디요 믿든 안 믿든 그렇지 않고는 뼛대겨 볼 자랑이 없다. 앞은 어둡고 빛은 지나간 날에만 비치는 서글픈 따라지의 목숨. 에라 어디에 불이라도 붙어라. 원자탄이 떨어졌으면 어떠랴.
기울 수도 없는 누더기의 젊음을 가누며 전황 뉴스에는 흥미도 없었다. 진종일 걸어보아야 도떼기시장을 맴도는 미아. 어느 날, 군고구마 장수가 된 동창생이 끝내 자살을 하고 친구들은 오히려 그 결단에 쾌재를 부르던 통곡. 지금도 내 귀에서 그날의 통곡이 지워지지 않는다. ―자식, 혼자만 가문 뎨일이야.
9
나의 눈에는 넓은 원야(原野)의 그림자가 있다. 한 무리의 새가 건너가며 굽어본 넓은 원야(原野)의 그림자가 있다.
앞이 보이지 않게 쏟아지던 싸락눈에 뿌린 혈흔. 도도하게 살리라던, 우리가 점점점 작아져 간 저 역사 위에 찢어진 상흔을 남기고 아픔을 끼루 끼룩 울면서 내일을 내일을, 아 내일을……
매기 소묘(素描), 춘조사, 1958
박남수 시인 / 비비추가 된 새
1
지금, 새는 온갖 고민, 온갖 공포를 뛰어 넘었다. 그것은 한 줌의 흙, 한 방울의 물. 한 포기의 비비추가 되어, 지금 그것은 북망 뒷기슭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방울 소리를 내고 있다.
2
가을 하늘이 곱게 흐르고 있다. 때가 밀리듯 한 꺼풀의 유한(有限)한 것을 벗기고 지금, 비비추의 방울 소리는 맑고 깊은 하늘의 가슴에 울리고 있다. 어느 젊은 여류 시인의 공간에 울리고 있다.
3
사월에 죽은 넋이가 시월에 여무는 건강을 휘파람 분다. 산길을 구비 내려 술 익는 마을 솔밭 지나 길이 끊긴 어느 산사(山寺)에서 선어(禪語)를 외우고 있을까. 지금, 쏴아 송뢰의 알지 못할 말씀이 내 귀에 그득히 흰 버금을 일구고 있다.
4
날이 어두웠는가, 산 밑을 도오는 헤드라이트가 내 어린 날의 반딧불 날듯 한다. 그야 별장이든 원두막이든 이승의 끝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쉰둘의 어둔 눈으로 찾아가는 내 귀로의 초라한 모습이어.
5
가지에서 가지로 옮아 앉듯 그렇게 쉽게 인생을 풀은 시인의 묘소에서 지금, 벗들은 즐겁게 비비추의 방울 소리를 듣고 있다. 청록(靑鹿)의 운(韻). 어느 선사(禪寺)를 기어오르던 청록(靑鹿)의 울음을 듣고 있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사모곡(思母曲)
아침녘 잠결에 들리는 남비 부딪는 소리. 잠결에 솔솔 스며드는 찌개 끓는 내음. 그래선지 아침녘에 어머님의 꿈을 꾸었다. 소식을 모르기 이십유여년(二十有餘年), 요새 서울에선 보기 어렵지만 망아지도 송아지도 자라면 어미를 잃고 산다. 그래선지 그 눈망울이 늘 눈물 같은 것이 끼어 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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