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시인 / 돌베개, 야곱
그때 집을 나와 빈 들에 잠잘 때 베고 자던 돌베개 홀로 이슬 젖고, 피빛 눈물 젖고, 별들이 떨구고 간 꿈의 부스러기, 눈물 부스러기, 쓸어모아 깔고 자는 잠자리, 한밤에 뻗쳐오른 사다리 꿈, 오르락내리락 하늘까지 높고 높은 천사들의 옷깃소리 노랫소리 웃음소리 황홀하던, 남가일몽, 일장춘몽 새벽녘, 서녘 멀리 한 조각 푸른 달 걸려 떨고, 풀버러지 즐즐 울고, 배고픔, 외로움, 뉘우침만 뼈저려, 어떡할까 막막한 들 돌베개 고쳐 베는. 눈물 철철 고쳐 베는.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4
박두진 시인 / 마법(魔法)의 새
아직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너는 하늘에서 내려온 몇 번만 날개 치면 산골짝의 꽃 몇 번만 날개 치면 먼 나라 공주로,
물에서 올라올 땐 푸르디 푸른 물의 새 바람에서 빚어질 땐 희디 하얀 바람의 새 불에서 일어날 땐 붉디 붉은 불의 새로 아침에서 밤 밤에서 꿈에까지 내 영혼의 안과 밖 가슴 속 갈피 갈피를 포릉대는 새여.
어느 때는 여왕으로 절대자로 군림하고 어느 때는 품에 안겨 소녀로 되어 흐느끼는 돌아설 땐 찬바람 빙벽 속에 화석하며 끼들끼들 운다.
너는 날카로운 부리로 내 심장의 뜨거움을 찍어다가 벌판에 꽃 뿌리고 내가 싫어하는 짐승 싫어하는 뱀들의 그것의 코빼기를 발톱으로 덮쳐 뚝뚝 듣는 피를 물고 되돌아올 때도 있다.
너는 홀로 쫓겨 숲에 우는 어린 왕자의 말이다가 밤마다 달빛 섬에 홀로 우는 학이다가 오색 훨훨 무지개 속 구름 속의 천사이다가 돌로 치는 군중 속의 피 흐르는 창녀이다가 한 번 맡으면 쓰러지는 독한 꽃의 향기이다가 새여.
느닷없이 얼키설키 영혼을 와서 어지럽혀 나도 너를 알 수 없고 너도 나를 알 수 없게 눈으로 서로 보면 눈이 넋으로 서로 보면 넋이 타면서 서로 아파 깊게 깊게 앓는,
서로 오래 영혼끼리 꽃으로 서서 우는 서로 찾아 하늘 날며 종일을 울어예는 어쩔까 아 징징대며 젖어오는 울음 아직도 너를 나는 사랑하고 있다.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묵시록(黙示錄)
나의 사랑하는 이의 꿈이여 거기에 있거라 아무도 올라갈 수 없는 하늘 언덕의 노을자락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하늘 꽃의 꽃언덕 그 무지개로도 햇볕살로도 바람결로도 이슬 방울로도 하늘 푸르름으로도 짜낼 수 없는 깁, 그 맞닿아야 할 가슴과 가슴의 따스함 입술과 입술의 보드라움 눈과 눈의 깊음 살과 살의 향기로움이 내려 엉긴 아, 어디까지 어디까지 가도 그 멀음 끝이 없고 언제까지 언제까지 가도 그 오램 끝이 없는 너와 나 닿고자 하는 언덕의 사랑이여 이루어지고 싶은 그 꿈의 꼭대기 자리잡고자 하는 사랑의 안칡이여 거기 있거라.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별밭에 누워
바람에 쓸려 가는 밤하늘 구름 사이 저렇게도 파릇한 별들의 뿌림이여 누워서 반듯이 바라보는 내 바로 가슴 내 바로 심장 바로 눈동자에 맞닿는 너무 맑고 초롱한 그 중 하나 별이여 그 삼빡이는 물기 어림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려 하지만 무심하게 혼자 누워 바라만 보려 하지만 오래오래 잊어버렸던 어린 적의 옛날 소년쩍 그 먼 별들의 되살아옴이여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고 있으면 글썽거려 가슴에 와 솟구치는 시름 외로움인지 서러움인지 분간 없는 시름 죽음일지 이별일지 알 수 없는 시름 쓸쓸함도 몸부림도 흐느낌도 채 아닌 가장 안의 다시 솟는 가슴 맑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울고 싶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소리지름이어
自苑캣 高山植物),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봄에의 격(檄)
일어나라.
나무여. 잠자는 산이여. 돌이여. 풀이여. 땅버러지여. 물이여. 웅덩이여. 시내여. 바다여. 이러한 것들의, 죽음이여. 넋이여. 얼이여. 영이여. 이러한 것들끼리의 사무침, 이러한 것들끼리의, 눈물이여. 한숨이여. 피보래여. 반항이여. 불덩어리여.
일어나라.
산에서는 오래 두고 산이래서 사는 것, 입이 붉은 너희, 칡범이여. 개호주여. 살가지여. 곰이여. 여우여. 승냥이여. 오소리여. 멧돼지여. 바보 같은 사슴이여. 노루여. 너구리여. 토끼여. 방정맞은 다람쥐여. 너희들은 또 너희들끼리의, 눈물이여. 피흘림이여. 잡아먹음, 접아먹힘이여. 쫓겨 감이여. 달아남이여. 한숨이여. 불덩어리여. 그 중에도 친친한, 어둠 속에 들엎드린, 능구렁이여. 까치독사여. 독 이빨이여.
일어나라.
이제야 너희들은 너희들끼리의, 오래고 억울한 사무침을 위하여, 혓바닥을 위하여, 어금니를 위하여, 발톱들을 위하여, 핏대들을 위하여, 약탈을, 살륙을, 겁탈과 결투, 승리를, 둔주를, 패배들을 위하여, 정복을, 추격을, 피흘림을 위하여,
일어나라.
숲에서는 오래오래 숲이래서 사는 것, 날개쭉질 가진, 멧새여. 할미새여. 무당새여. 꾀꼬리여. 비둘기여. 산제비여. 칼새여. 지미새여. 쟁끼여, 까투리여. 부헝이여. 올빼미여. 독수리여. 매여. 너희들의 입부리, 너희들의 발톱, 너희들의 깃쭉지의, 너희들은 또 너희들끼리의, 사랑이며, 노래며, 보금자리며, 속삭임이며, 따스함이며, 보드라움이며, 싸움이며, 할큄이며, 피흘림이며, 죽임이며, 쫓기임, 눈물이며, 안도며, 승리며, 또 평화들을 위하여,
일어나라.
아, 물에서는 또 물이래서 오래 사는, 그 중에서도 못생기디 못생긴, 미꾸라지여. 구구락지여. 자가사리여. 개멱자구여. 실뱀장어여. 모래무지, 징검새우, 물무당이여, 똥방개여, 참방개여. 송사리떼여. 너희들의 집단, 너희들의 보람, 너희들의 투쟁, 너희들의 사상, 너희들의 유전, 너희들의 발광, 너희들의 죽음들을 위하여, 너희들의 눈물, 너희들의 피, 너희들의 분노와 반항들을 위하여,
일어나라.
땅버러지여. 흙일래 흙 속에서 흙낼 맡고 사는, 지지리도 못생긴, 아, 그 중에서도, 개밥뚜기여. 오줌쌔기여. 소금쟁이여. 굼벙이, 지렁이, 쇠똥벌레여. 딱정벌레, 찝게벌레, 방구벌레여. 노린챙이, 투구벌레, 지네 새끼여. 이제야 너희들은, 너희들의 보람, 너희들의 쾌적, 너희들의 사랑, 너희들의 투지, 너희들의 혁명, 너희들의 승리들을 위하여,
일어나라.
그리하여, 산에서는 산읫 것, 물에서는 물읫 것, 바다에선 바다읫 것, 흙에서는 흙읫 것이, 이제야 일제히들, 휘날리며 휘날리며 깃발들을 들라. 뿔들을 뻗치라, 이빨을 발톱을, 부리들을 갈라. 목청들을 돋우라. 비약하라. 선전하라, 행진하라. 돌격하라. 합창하라. 노호, 절규, 승리하라. 정복하라. 개선하라. 환호하라. 패배하라. 둔주하라. 진실로, 독에는 독, 칼에는 칼, 피에는 피로, 눈물에는 눈물, 사랑에는 사랑, 포옹에는 포옹으로, 아, 그 중에서도, 불이 붙는 사랑에는 불이 붙은 사랑으로, 있고 나고, 나고 죽고, 사랑하기 위하여, 있는 것 일체의, 생명이란 생명의, 산이며 숲, 물이며 바다, 하늘이며 흙 속의, 바람결 속의, 정이며 넋, 얼이며 영들까지, 아, 일체의 있는 것은, 너희들, 스스로를 위하여, 이때에야 진실로,
일어나라.
거미와 성좌(星座), 대한기독교서회,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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