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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모윤숙 시인 / 화랑(花郞)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4.

모윤숙 시인 / 화랑(花郞)

 

 

당신을 누구라고 부를지 나는 모릅니다

친구라 부르기엔 너무 황송하고 스승이라 하기엔 너무 이 맘이 행복합니다

당신의 눈결이 선명(鮮明)하게 제 혼(魂)을 씻겨 갈 때마다 나는 적은 방황에 마음을 놓아주게 됩니다

당신의 뜻으로부터 풍기는 햇빛 같은 밝음이 거리와 시민(市民)의 가슴 위를 쏠 때에는 시대(時代)와 역사(歷史)는 높은 소리로

당신의 허리를 감고 면류관을 씌우지 않았습니까

찬 바람이 도는 옛 길거리에서 나는 뜨거운 당신의 부름을 찾습니다

당신이 던지고 가신 쾌활한 웃음의 꽃을 이 옷깃에 단장해 보고 싶은 저녁입니다

마음과 몸이 가난해져서 캄캄한 실내(室內)에 오래 앉았던 여인(女人)이었습니다

당신을 만나러 길거리에

오고 가는 사람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어두운 길거리에 어두운 그림자들만이 쓰러지며 엎어지며 어수선할 뿐입니다

낯선 음성(音聲)과 낯선 모습만이 유령(幽靈)의 떼가 되어 중얼거립니다

이 중얼거림 속에 당신의 음성은 없습니다

당신은 가셨습니다. 긴 말채찍과 화려한 창검의 문을 닫은 채 당신은 가셨습니다

당신도 모르게 주신 옛 시간(時間) 안에 파묻힌 찬란한 친절(親切)을 후회하시지 마셔요

언제나 나는 당신의 친절을 욕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니

당신은 장차 어느 시대를 만나야 당신다운 시민(市民)이 되시겠습니까

나는 오늘도 저문 황혼(黃昏) 속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또 무섭고 가련한 모습을 가진 당신이 나타날까 두려워 내 문(門)을 굳게 잠급니다

당신은 벌써 지나셨습니까 그러면 아직도 이 거리에 안 오셨습니까

당신이 오시면 눈물은 황홀한 비가 되어 내 혼(魂)을 적실 것이나 당신이 오시면 빛나는 추억(追憶)과 자랑은 재난(災難)을 만날까 두렵습니다

이 생(生)이 다하는 날에도 나는 당신을 기다리는 영광으로 내 죽음을 장식하오리다. 그러나 이 찬란한 죽음 전(前)에 당신의 가난한 모양이 나타나서는 안됩니다. 당신의 눈이 나를 얼마나 절망(絶望)시킬까 함은 상상키도 어렵습니다

당신의 차가운 입술이 나의 충성을 조소할 것을 생각키도 어렵습니다. 당신은 지금 내 문(門)앞에 서 계십니까

모란과 흰 나비가 출렁이는 내 뜰은 당신을 기다려 찬란하였습니다

그대를 영원(永遠)히 기다릴 몸이어니 이 꽃과 이 나비도 내 뜰에서 하늘을 숨쉬며 당신의 이름을 찬양할 것입니다

당신이여! 나를 떠나지 않던 때처럼

내 곁에 쉬옵소서

당신이 안 오시는 동안 외로운 행복(幸福)이

내 운명을 덮었으나

 

이제 당신이 오실 때는 왔습니다

진실한 마음의 갑옷을 입으시고 쓸쓸한 밤을 지나 어서 나의 하늘로 발길을 옮기소서

주림에 떠는 자(者) 자유(自由)에 목마른 자(者) 헐벗은 애기들의 기도 속에 당신은 살아 계십니다

천년(千年)의 검을 잡으시고 만대(萬代)의 의지(意志)을 품으시와 사슬에 매인 당신의 현실을 구하사이다.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毛允淑) 시인 / 1910년-1990년

호는 영운(嶺雲). 1910년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자랐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35년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선과(選科)를 수료. 그뒤 월간 《삼천리(三千里)》와 중앙방송국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였고, 19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 1937년 장편 산문집 《렌의 애가》를 출간하였다.  8.15광복 뒤에는 문단과 정계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해, 1948년에는 월간문예지《문예》를 발간하는 한편, 1948·1949년에는 국제연합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1950년 대한여자청년단장, 1954년 한국펜클럽 부회장,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사 및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을 거쳐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1년 8대국회에 민주공화당 전국구 대표로 당선되었고, 이후 한국현대시인협회장(1973), 통일원 고문(1974),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1977), 문학진흥재단 이사장(1980) 등을 지냈다. 국민훈장 모란장, 예술원상, 3·1문화상 등을 받았고, 저서에는 《모윤숙 전집》《논개》《렌의 애가》 등이 있다. 196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1970), 1979년 3·1문화상을 받았고, 1991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