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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두진 시인 / 가시 면류관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1.

박두진 시인 / 가시 면류관

 

 

비로소 하늘로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

죽음의 바닥으로 딛고 내려갈 수 있는 사다리.

빛이 그 가시 끝 뜨거운 정점들에 피로 솟고

비로소 음미하는 아름다운 고독

별들이 뿌려 주는 눈부신 축복과

향기로이 끈적이는 패배의 확증 속에

눌러라 눌러라 가중하는 이 황홀

이제는 미련 없이 손을 들 수 있다.

누구도 다시는 기대하지 않게

혼자서도 이제는 개선할 수 있다.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갈보리의 노래 2

 

 

마지막 내려 덮는 바위 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물 같은 치욕(恥辱)을, 불붙는 분노(憤怒)를, 에어 내는 비애(悲哀)를, 물새 같은 고독(孤獨)을 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 있었는가? 꽝꽝 쳐 못을 박고, 창(槍)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 입맞추어 배반(背叛)하고, 매어 달아 죽이려는, 어떻게 그 원수(怨讐)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강(强)할 수가 있었는가? 파도(波濤)같이 밀려오는 승리(勝利)에의 욕망(欲望)을 어떻게 당신은 버릴 수가 있었는가? 어떵게 당신은 패(敗)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약(弱)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이길 수가 있었는가? 방울방울 땅에 젖는 스스로의 혈적(血滴)으로, 어떻게 만민(萬民)들이 살아날 줄 알았는가? 어떻게 스스로가 신(神)인 줄을 믿었는가? 커다랗게 벌리어진 당신의 두 팔에 누구나 달려들어 안길 줄을 알았는가? 엘리…… 엘리…… 엘리…… 엘리…… 스스로의 목숨을 스스로가 매어 달아, 어떻게 당신은 죽을 수가 있었는가? 신(神)이여! 어떻게 당신은 인간(人間)일 수 있었는가? 인간(人間)이여! 어떻게 당신은 신(神)일 수가 있었는가? 아! 방울방울 떨구어지는 핏방울은 잦는데, 바람도 죽고 없고 마리아는 우는데, 마리아는 우는데, 인자(人子)여! 인자(人子)여! 마지막 쏟아지는 폭포(瀑布) 같은 빛줄기를 어떻게 당신은 주체할 수 있었는가?

 

거미와 성좌(星座), 대한기독교서회, 1962

 

 


 

 

박두진 시인 / 강강수월래

 

 

올려다보는 달이 하늘에 흔들리고 있다.

강 속을 흐르는 달이 차갑게 흐느끼고 있다.

조그만 바람에도 출렁이는 달빛

조그만 물살에도 산산이 부서져 흐느끼는 달빛

옛날에 옛날에

옥으로 금으로 만든 도끼로 찍어다 지은

계수나무 기둥과 서까래

초가 삼간도 헐리고 폐허

영하 200도의 침묵의 잿빛 벌판

달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달이 물 속을 흐느껴 가고 있다.

강 강 수월래

한가위 하늘이 저 달의 얼굴

달의 가슴 달의 사랑

눈알이 노란 청년 몇 사람이

무거운 기계의 몸으로 올라가 꽂아 놓은

순결의 상처에 이마 찡그리고

달은

강 강 수월래

옛날을 생각하고 옛날을 잃어버린 사람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

꿈을 생각하고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올려다보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의 우리들

부끄러워하는 마음의 저 달빛,

달은 하나인데 우리들 둘의 마음

천의 마음.

마음과 사랑 꿈은 하나인데

저 둘의 달빛 천의 달빛,

강―강 수월래 강 강 수월래

올려다보는 달이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저마다 우리들

하나씩의 가슴의 달이 흐느끼고 있다.

 

야생대(野生代), 일조각, 1977

 

 


 

 

박두진 시인 / 검법(劍法)

 

 

칼을 간다.

 

달밤에 홀로

벌판에서

칼을 간다.

 

엉겅퀴 한 잎

흐르는 강물을 베이기에도 무딘

칼날.

 

함부로 떼지어

광기로 끼얹는 잔내비떼의

흙탕물,

밤에 와서 뿌리고 가는

횡포의 이리떼의

유혈로 녹이 슬은,

 

달밤에 홀로

칼을 간다.

 

저렇게 틀어막힌 봉쇄의 입,

저렇게 틀어막힌

절벽의 귀,

저렇게 캄캄하게 눈 칭칭 가리운 채

 

묶여서 투하되는 대낮의 자유,

 

소용돌이 심해 속의

칠색 오로라여.

 

더러는 툭툭한 구둣발

더러는 투망

더러는 공중잡이

더러는 배차기로

학살되는 지성,

 

그 양심,

이제는

잊어버린

밤에

홀로,

이성의 돌을 닦아

칼 쓱쓱 간다.

 

대 상단 높이 들어

파람을 끊어,

 

썽둥 달을 둘로 잘라

장강 터 놓는다.

 

포옹무한(抱擁無限), 범조사, 1981

 

 


 

 

박두진 시인 / 결투(決鬪)

 

 

죽어서 평등한 빈 벌의 뼈의 달빛

피에 취한 맹수들이 으릉으릉 온다.

깃발도 하나 없이

너도 이미 가 버린

 

혼자로다 신나는 무인 광야 결투,

다만

별 하나 훌쩍 따서 손아금에 쥐고,

맨발로 창 하나로 치고 치고 친다.

밤의 광야 달빛 활활 불을 지른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3

 

 


 

박두진[朴斗鎭, 1916.3.10 ~ 1998.9.16] 시인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誌를 통해 등단.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3인 합동시집 『靑鹿集(청록집)』(을유문화사, 1946)을 간행한 뒤 첫 개인시집 『해』를 출간. 이후 『오도』, 『거미와 성좌』, 『인간밀림』, 『고산식물』, 『사도행전』, 『수석열전』, 『속 수석열전』, 『야생대』, 『포옹무한』, 『빙벽을 깬다』 등의 시집과 시론집 『시와 사랑』, 『한국현대시론』 등을 간행. 3.1문화상 예술상, 인촌상, 지용문학상, 외솔문학상, 동북아기독문학상 등을 수상. 연세대에서 정년퇴임 후 단국대와 추계예대에서 후학 양성. 1998년에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