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 시인 / 야경(夜景)
병아리 나래에 바람이 설레고 방아 기슭에 물소리 차다 이삭 담긴 함지박에 황혼이 덮이면 아버지의 호밋날도 흙 속에 잠든다
토방의 등불이 그윽히 정다워 도라지는 어느새 다아 찢어 담갔다 맞은편 개 바자에 풀먹인 빨래들이 꽃핀 듯 환하다 대림 피던 분이 얼굴이 달 아래 먼 길을 더듬는다
꽃냄새 풍기는 외양간 지붕에 호박 넝쿨 이슬 맞아 조용히 뻗어 가고 수수가루 묻은 엄마 얼굴이 뒷바자 새에 잠시 나왔다 사라진다.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 시인 / 어느 여인(女人)
물가의 한밤은 깊어서 향 어린 나무 냄새 풍기는 잠든 마을 옆 낡은 성(城) 위로 기우는 달이 그 집 들창에 스러져 간다
헐린 요 위에 누운 늙은 여인(女人)의 얼굴 바람은 이따금 그 머리 날려 산란히 흩어 가나 베개의 꿈은 깊어 근심과 탄식 밤 그늘에 숨긴다 고생의 무늬 그 몸에 새긴 채
옛날 즐겁던 우물 길 그리운 물동이 배추밭 이랑에 흘려 둔 다복(多福)한 이야기들 지금은 지나 온 고향(故鄕)의 저녁 연기 기억(記憶)에 아람이 피어났다 사라지는 한가하던 이야기의 끝처럼 저 별이 빛나고 새롭게 가난한 창안에 밤새도록 그 여인(女人)의 빈 잔을 채우리니 생명(生命)이 좀먹어 마지막 숨질 때 그는 한갓 저녁 숲 위에 엎드려 헐린 치마귀로 신(神)의 음성을 모으리.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 시인 / 어머니
맑은 새벽에 산골의 안개 밀려 가듯이 조용한 요람 속 어머니 호흡이여 광란스런 마음 바다를 잔잔히 하옵니다
탄식과 멍에로 삶이 비틀거리고 위선과 속임에서 이 몸이 찢기울 때 등대마저 꺼진 세상 거리로 자애로운 어머니 손이 저를 부르더이다
수많은 사랑 그 화려한 세상엔 꺼지고 흩어지는 색등이 어렸거늘 수식 없는 내 어머니 맑은 그 가슴에 영원한 사랑이 끓어 흐르옵니다
깊어 끝없고 넓어 한없는 그 정을 좁고 거칠은 이 정성이 당하리이까 자비한 내 어머니 끝없는 사랑에 고달픈 이 마음 고이 잠드옵니다.
옥비녀, 동백사,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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