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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모윤숙 시인 / 야경(夜景)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1.

모윤숙 시인 / 야경(夜景)

 

 

병아리 나래에 바람이 설레고

방아 기슭에 물소리 차다

이삭 담긴 함지박에 황혼이 덮이면

아버지의 호밋날도 흙 속에 잠든다

 

토방의 등불이 그윽히 정다워

도라지는 어느새 다아 찢어 담갔다

맞은편 개 바자에

풀먹인 빨래들이 꽃핀 듯 환하다

대림 피던 분이 얼굴이

달 아래 먼 길을 더듬는다

 

꽃냄새 풍기는 외양간 지붕에

호박 넝쿨 이슬 맞아 조용히 뻗어 가고

수수가루 묻은 엄마 얼굴이

뒷바자 새에 잠시 나왔다 사라진다.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 시인 / 어느 여인(女人)

 

 

물가의 한밤은 깊어서

향 어린 나무 냄새 풍기는

잠든 마을 옆

낡은 성(城) 위로 기우는 달이

그 집 들창에 스러져 간다

 

헐린 요 위에 누운

늙은 여인(女人)의 얼굴

바람은 이따금 그 머리 날려

산란히 흩어 가나

베개의 꿈은 깊어

근심과 탄식 밤 그늘에 숨긴다

고생의 무늬 그 몸에 새긴 채

 

옛날 즐겁던 우물 길

그리운 물동이

배추밭 이랑에 흘려 둔

다복(多福)한 이야기들

지금은 지나 온 고향(故鄕)의 저녁 연기

기억(記憶)에 아람이 피어났다 사라지는

한가하던 이야기의 끝처럼

저 별이 빛나고 새롭게

가난한 창안에 밤새도록

그 여인(女人)의 빈 잔을 채우리니

생명(生命)이 좀먹어 마지막 숨질 때

그는 한갓 저녁 숲 위에 엎드려

헐린 치마귀로 신(神)의 음성을 모으리.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 시인 / 어머니

 

 

맑은 새벽에

산골의 안개 밀려 가듯이

조용한 요람 속 어머니 호흡이여

광란스런 마음 바다를 잔잔히 하옵니다

 

탄식과 멍에로 삶이 비틀거리고

위선과 속임에서 이 몸이 찢기울 때

등대마저 꺼진 세상 거리로

자애로운 어머니 손이 저를 부르더이다

 

수많은 사랑 그 화려한 세상엔

꺼지고 흩어지는 색등이 어렸거늘

수식 없는 내 어머니 맑은 그 가슴에

영원한 사랑이 끓어 흐르옵니다

 

깊어 끝없고 넓어 한없는 그 정을

좁고 거칠은 이 정성이 당하리이까

자비한 내 어머니 끝없는 사랑에

고달픈 이 마음 고이 잠드옵니다.

 

옥비녀, 동백사, 1947

 

 


 

모윤숙(毛允淑) 시인 / 1910년-1990년

호는 영운(嶺雲). 1910년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자랐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35년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선과(選科)를 수료. 그뒤 월간 《삼천리(三千里)》와 중앙방송국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였고, 19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 1937년 장편 산문집 《렌의 애가》를 출간하였다.  8.15광복 뒤에는 문단과 정계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해, 1948년에는 월간문예지《문예》를 발간하는 한편, 1948·1949년에는 국제연합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1950년 대한여자청년단장, 1954년 한국펜클럽 부회장,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사 및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을 거쳐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1년 8대국회에 민주공화당 전국구 대표로 당선되었고, 이후 한국현대시인협회장(1973), 통일원 고문(1974),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1977), 문학진흥재단 이사장(1980) 등을 지냈다. 국민훈장 모란장, 예술원상, 3·1문화상 등을 받았고, 저서에는 《모윤숙 전집》《논개》《렌의 애가》 등이 있다. 196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1970), 1979년 3·1문화상을 받았고, 1991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