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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노천명 시인 / 아름다운 얘기를 하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17.

노천명 시인 / 아름다운 얘기를 하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닷돈짜리 왜떡을 사 먹을 제도

살구꽃이 환한 마을에서 우리는 정답게 지냈다

 

성황당 고개를 넘으면서도

우리 서로 의지하면 든든했다

하필 옛날이 그리울 것이냐만

늬 안에도 내 속에도 시방은

귀신이 뿔을 돋쳤기에

 

병든 너는 내 그림자

미운 네 꼴은 또 하나의 나

 

어쩌자는 얘기나, 너는 어쩌자는 얘기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별을 쳐다보며, 희망사, 1953

 

 


 

 

노천명 시인 / 어떤 친구에게

 

 

같은 별 아래 태어난 여인이기에

너와 나는 함께 울었고 같이 웃었다

너를 찾아 밤길을 간 것도

내 가슴을 펼 수 있는 네 가슴이었기―

 

대학 교정에서 그대를 만났을 제

내 눈은 신록을 본 듯 번쩍 띄었고

손길을 잡게 되던 날 내 가슴은 뛰었었나니

그대와 나는 자매별모양 빛났더니라

 

어떤 사람 너를 더 빛난다 했고

다른 이 또 나를 더 좋다 했다

 

너와 나 같은 동산에 서지 않았던들

너 나를 이런 곳에 밀어 넣지는 않았을 것이고

 

우리는 얼마나 더 정다웠으랴

 

별을 쳐다보며, 희망사, 1953

 

 


 

 

노천명 시인 / 자화상

 

 

5척 1촌 5푼 키에 2촌이 부족한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 하기 어려워한다.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전시대(前時代)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럼지한 손에 예술품답지 않게 얹혀져 가냘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고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격은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을 게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 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삼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 데가 있는 것을 잘 알건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고만 유언비어에도 비겁하게 삼간다 대[竹]처럼 꺾어는 질지언정

 

구리[銅]처럼 휘어지며 꾸부러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

 

산호림, 자가본, 1938

 

 


 

노천명(盧天命, 1912∼1957) 시인

1912년 황해도의 장연(長淵)에서 출생.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 졸업.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 《신동아》 6월호에 〈밤의 찬미(讚美)> 를 발표하며 데뷔. 저서로는 시집으로 1938년 초기의 작품 49편을 수록한 제1시집 『산호림(珊瑚林)』,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된 1945년 2월 출간된 제2시집 『창변(窓邊)』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어 옥중시와 출감 후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 1953년  출간된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와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 등이 있음. 195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