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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시인 / 변명
흐르는 물은 외롭지 않은 줄 알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흔들며 예식의 춤과 노래로 빛나던 물길, 사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말했다지만 가볍게 보아온 세상의 흐름과 가버림. 오늘에야 내가 물이 되어 물의 얼굴을 보게 되다니.
그러나 흐르는 물만으로는 다 대답할 수 없구나. 엉뚱한 도시의 한쪽을 가로질러 길 이름도 방향도 모르는 채 흘러가느니 헤어지고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 우리.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마음도 알 것 같으다. 밤새 깨어 있는 물의 신호등, 끝내지 않는 물의 말소리도 알 것 같으다.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1
마종기 시인 / 비밀(秘密) 2
우리들 비밀은 갈대밭이야. 바람보다 더 가벼운 갈대밭이야. 아무리 흔들려도 소리내지 않는 꺾어진 빈 대궁이의 없는 공기야. 그래서 그것은 보이지도 않고 우리를 미행(尾行)하는 그림자일뿐 미행하는 그림자의 없는 흔적이야.
겨울이 또 우리를 지나가는군. 안식(安息)의 깊은 겨울은 다 어디 갔는지. 이제는 말없이 매해 추위에 떨 뿐이지만 우리는 알아, 또 눈부시게 믿고 있지. 드디어 저 환한 비밀의 눈뜸.
내가 다시 영혼의 목마른 자유인(自由人)이 되어 당신의 끝없는 갈대밭을 헤쳐가다가 내 눈을 뜨게 하는 당신의 몸짓. 꺾어진 비밀의 진한 육질(肉質)이 흘러도 눈감지 않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이야.
변경의 꽃, 지식산업사, 1976
마종기 시인 / 비 오는 날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날 때 환한 불을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1
마종기 시인 / 빙하시대(氷河時代)의 불
1
날씨는 매일 흐렸다. 돌을 다듬던 손은 얼고 대신 빛나기 시작하는 날카로운 돌의 이빨을 본다. 길고긴 빙하시대(氷河時代). 거처(居處)에는 피할 수 없이 얼음산의 얼굴 커지고 불 타다 남은 그림자를 거두어 소리 없이 어는 우리들의 뼈를 덮는다.
2
아껴라, 아껴라, 시대(時代)의 불. 살벌하고 냉엄한 때가 온다. 날카로운 석기(石器)의 연장도 재가 되고 불과 나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원시인(原始人)의 눈물로도 감출 수 없던 어둡고 긴 밤의 우리들의 꿈.
잊지 마라, 낮게 타는 불은 산 위에 서고 빙판에 붙는 불은 우리들의 끝없는 대답이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마종기 시인 / 산 안에 또 산이
산 안에 또 산이 하나 있구나. 눈앞에 보이는 산 안에 숨어사는 산이 있으니 산에 오르면 싱싱하게 산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구나. 거칠은 산의 피부 안에 깊고 부드러운 산 냄새.
물 안에 물이 없으면 우리들이 물 안에 보일 리도 없겠지. 바다에 혼자 나가서도 멀리서 오는 말을 들을 수가 없겠지.
그러니 내 속에 내가 있는 것도 할 수 없겠지. 내 속에 숨어사는 나보다 작은 목숨, 조용하면 들리는 말소리의 혼.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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