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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마종기 시인 / 변명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1.

마종기 시인 / 변명

 

 

흐르는 물은

외롭지 않은 줄 알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흔들며

예식의 춤과 노래로 빛나던 물길,

사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말했다지만

가볍게 보아온 세상의 흐름과 가버림.

오늘에야 내가 물이 되어

물의 얼굴을 보게 되다니.

 

그러나 흐르는 물만으로는 다 대답할 수 없구나.

엉뚱한 도시의 한쪽을 가로질러

길 이름도 방향도 모르는 채 흘러가느니

헤어지고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 우리.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마음도 알 것 같으다.

밤새 깨어 있는 물의 신호등,

끝내지 않는 물의 말소리도 알 것 같으다.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1

 

 


 

 

마종기 시인 / 비밀(秘密) 2

 

 

우리들 비밀은 갈대밭이야.

바람보다 더 가벼운 갈대밭이야.

아무리 흔들려도 소리내지 않는

꺾어진 빈 대궁이의 없는 공기야.

그래서 그것은 보이지도 않고

우리를 미행(尾行)하는 그림자일뿐

미행하는 그림자의 없는 흔적이야.

 

겨울이 또 우리를 지나가는군.

안식(安息)의 깊은 겨울은 다 어디 갔는지.

이제는 말없이 매해 추위에 떨 뿐이지만

우리는 알아, 또 눈부시게 믿고 있지.

드디어 저 환한 비밀의 눈뜸.

 

내가 다시 영혼의 목마른 자유인(自由人)이 되어

당신의 끝없는 갈대밭을 헤쳐가다가

내 눈을 뜨게 하는 당신의 몸짓.

꺾어진 비밀의 진한 육질(肉質)이 흘러도

눈감지 않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이야.

 

변경의 꽃, 지식산업사, 1976

 

 


 

 

마종기 시인 / 비 오는 날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날 때

환한 불을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1

 

 


 

 

마종기 시인 / 빙하시대(氷河時代)의 불

 

 

  1

 

  날씨는 매일 흐렸다.

  돌을 다듬던 손은 얼고

  대신 빛나기 시작하는

  날카로운 돌의 이빨을 본다.

  길고긴 빙하시대(氷河時代).

  거처(居處)에는 피할 수 없이

  얼음산의 얼굴 커지고

  불 타다 남은 그림자를 거두어

  소리 없이 어는

  우리들의 뼈를 덮는다.

 

  2

 

  아껴라, 아껴라,

  시대(時代)의 불.

  살벌하고 냉엄한 때가 온다.

  날카로운 석기(石器)의 연장도 재가 되고

  불과 나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원시인(原始人)의 눈물로도 감출 수 없던

  어둡고 긴 밤의 우리들의 꿈.

 

  잊지 마라,

  낮게 타는 불은 산 위에 서고

  빙판에 붙는 불은

  우리들의 끝없는 대답이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마종기 시인 / 산 안에 또 산이

 

 

산 안에 또 산이 하나 있구나.

눈앞에 보이는 산 안에

숨어사는 산이 있으니

산에 오르면 싱싱하게

산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구나.

거칠은 산의 피부 안에

깊고 부드러운 산 냄새.

 

물 안에 물이 없으면

우리들이 물 안에 보일 리도 없겠지.

바다에 혼자 나가서도

멀리서 오는 말을 들을 수가 없겠지.

 

그러니 내 속에 내가 있는 것도 할 수 없겠지.

내 속에 숨어사는 나보다 작은 목숨,

조용하면 들리는 말소리의 혼.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1

 

 


 

 마종기 시인

1939년 일본 동경에서 출생. 연세대 의대 및 서울대 대학원 졸업. 월간 『현대문학』 1959년 1월호에 박두진의 추천으로 발표 이후 3회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으로 『조용한 개선(凱旋)』, 『두번째 겨울』, 『변경(邊境)의 꽃』,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나라 하늘빛』, 『이슬의 눈』 등의 시집과 공동 시집 『평균율』Ⅰ·Ⅱ이 있음.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