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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시인 /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울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마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근심 걱정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김승희 시인 / 그림 속의 물
사랑스런 프랑다스의 소년과 함께 벨지움의 들판에서 나는 예술의 말[馬]을 타고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은 손을 들어 내가 그린 그림의 얼굴을 찢고 또 찢고 울고 있었고.
나는 당황한 현대의 이마를 바로 잡으며 캔버스에 물빛 물감을 칠하고, 칠하고.
나의 의학상식으로서는 그림은 아름답기만 하면 되었다. 그림은 거칠어서도 안 되고 또 주제넘게 말을 해서도 안 되었다.
소년은 앞머리를 날리며 귀엽게, 귀엽게 나무피리를 깎고 그의 귀는 바람에 날리는 은(銀) 잎삭. 그는 내가 그리는 그림을 쳐다보며 하늘의 물감이 부족하다고, 화폭 아래에는 반드시 강(江)이 흘러야 하고 또 꽃을 길러야 한다고 노래했다.
그는 나를 탓하지는 않았다. 현대의 고장난 수신기와 목마름. 그것이 어찌 내 죄(罪)일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내 죄(罪)라고 소년은 조용히 칸나를 내밀며 말했다.
칸나 위에 사과가 돋고 사과의 튼튼한 과육(果肉)이 웬일인지 힘없이 툭, 하고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나에게 강(江)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강(江)은 깊이깊이 흘러가 떨어진 사과를 붙이고 싹트고 꽃피게 하였다. 그리고 그림엔 노래가 돋아나고 울려 퍼져 그것은 벨지움을 넘어 멀리 멀리 아시아로까지 가는 게 보였다. 소년은 강(江)을 불러 내 그림에 다시 들어가라고 말했다. 화폭 아래엔 강(江)이 흐르고 금세 금세 환한 이마의 꽃들이 웃으며 일어났다.
피어난 몇 송이 꽃대를 꺾어 나는 잃어버린 내 친구에게로 간다. 그리고 강(江)이 되어 스며들어 친구가 그리는 그림 그곳을 꽃피우는 물이 되려고 한다. 물이 되어 친구의 꽃을 꽃피우고 그리고 우리의 죽은 그림들을 꽃피우는 넓고 따스한 바다가 되려고 한다.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태양미사, 고려원, 1979
김승희 시인 / 길이 없는 길 위에서
역촌동→상도동 구간을 오늘도 내일도 달리는 저 시내버스는 어쩌면 나보다 더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승객들이 오르고 나면 재빨리 문이 닫히고 시간이 없다고 갈 길이 멀다고 오늘도 내일도 의심 없이 그 길을 달려가는 저 노선버스는 나보다 더 고뇌가 없는 씩씩한 길을 가진 것이라 해도 좋다
매일매일 떠나야 할 분명한 시점과 닿아야 할 분명한 종점을 가진 것이 부럽다 해도 난 벌써 서른 다섯 살. 아스팔트 위를 먼지와 함께 불어 가는 가을 바람 처럼 그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는 어제 저녁의 구겨진 신문지 조각 처럼 나에겐 떠나야 할 곳도 닿아야 할 곳도 언제나처럼 분명치가 않다는 느낌이다
행복한 길을 가지기 위하여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행복한 길을 가져야 할까. 나는 아직도 아마 모른다. 다만 아침 저녁으로 종점에서 닿고 떠나는 행복한 시내버스들을 바라다보며 다만 나에겐 길이 없다는 절망과 길을 원하는 갈증이 우울증같이 멀미같이 환상의 외침이 되어 다가든다는 것뿐이다
달걀 속의 생(生), 문학사상사, 1989
김승희 시인 /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준다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준다, 거울 속에, 아니 아니, 화분 속에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나를 심고 거울 속에 물을 준다, 내가 죽어 있을 동안이라도 더욱 더욱 자라야 한다고, 환상이란 상심이지만 내가 잠들어 있을 동안이라도 몰래 몰래 자라야 한다고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나를 묻고 거울 속에 물을 준다,
도괴된 복도 속에 통조림 깡통이 하나 파묻혀 있다, 돌더미를 헤치고 통조림 깡통을 들여다보면 인스턴트 평화라고 뚜껑에 대문자로 적히어 있다, 통조림 깡통 속에 장조림된 나, 통조림 깡통 속에 장조림된 너, 평화는 불사신과 같이 방부처리되어 있어서 당신이 통조림 깡통을 땄을 때는 화두처럼 목 없는 닭 한 마리 평화롭게 온 세상 그지없이 평화롭게 누워 있었으니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준다, 거울 속에, 아니 아니, 화분 속에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나를 심고 거울 속에 물을 준다, 환상이란 천벌 같은 거지만 화분 속에는 사막식물이라는 선인장 화초가 심겨져 있고 화초인지 아닌지 그 선인장은 백년 동안에 한 번만 꽃피울 수 있다는 약속이 있다, 선인장 몸 위엔 갈퀴쇠 같은 물음표만 녹색으로 가시 돋쳐 왜? 왜? 왜? 라고 눈동자를 찌를 듯이 거울면으로 육박한다,
난수표 같은 절망은 자금회전이 안 됩니다, 이곳에선 희망만이 현금유통되고 있어요, 희망을 환불하려고 거울 창구 앞으로 다가서면 희망이란 얼마나 하잘것없는 잔돈푼인지, 거대한 절망의 허물 수 없는 어음에 비한다면 희망이란 얼마나 소소한 푼돈인지,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물을 준다, 이 생에선 그 꽃을 볼 수 없다 하여도,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주고, 절망에 죽음을 보탠 그 몸짓으로밖에 나는 그 선인장 꽃을 가꿀 줄을 모르니
미완성을 위한 연가, 나남,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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