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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시인 / 고산행(高山行)
열차는 평산을 지나쳤다 한다. 산역(山驛)에서는 낡은 의자에 기댄 남자들 두엇, 불을 끄고 통과할 어느 역에도 어쩌면 정거하지도 않을 기차를 우리들은 기다렸다. 밤은 깊고 자정 가까이 달은 떠올라 헌 거적대기 같은 빛이 세상을 덮어 주기도 하였지만 오늘 가지 못하면 내일 갈 수도 없고 마침내 영영 가지 못할 그곳에 가기 위하여 저쪽 어느 역에서도 우리들처럼 정든 마을에서 빠져나와 어둠 속에 서성대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발 밑에서는 버리고 가는 낙엽 또는 떨어져 뒹구는 젖은 노자 몇 닢.
동두천, 문학과지성사, 1979
김명인 시인 / 구름의 손
원래부터 그는 대단한 술사였다, 손 끝으로 허공을 쳐서 꽃을 피워내는 일 따위는 그의 하찮은 잔재주였지만 그것으로도 수많은 관객을 끌어모을 수가 있었다, 약과 세월의 틈틈이 그러나 솜씨는 낡아갔으므로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충격이 고안되었다, 그의 일은 날마다의 경이(驚異)로 식상한 기술들을 갈아 엎는 것, 그는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진지했으므로 회중(會衆)과 공창(公娼)과 심지어는 다른 야바위꾼들까지 그의 솜씨로 감동시켰다, 덩달아 명성도 높아졌지만 알고 보면 인기란 탐욕한 군중들의 시선에 감추인 칼인 것을 그와 관객은 날마다 서로를 베는 더 높은 수위(水位)로 한 계단씩 한 계단씩 밀려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낯선 것을 찾아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날선 칼을 찾아서 마침내 사람들의 환호에 얽매인 부표 떠오르는 동안 그는 일생일대의 솜씨를 펼쳐보여야 하는 막다른 높이에까지 올라섰다, 귓속에서는 부푼 이명(耳鳴), 먹먹한 세월이 발 아래에는 탐욕한 시선들이 목을 길게 빼물었지만 스스로를 대신할 어떤 계책도 없었으므로 그의 굳은 혓바닥엔 살기가 돋고 다만, 그 위에 내리친 온갖 기(氣), 흩어지는 피의 선연함 그는 평생에 탕진한 주문들을 모아서 번개를 불러내었고, 그제서야 탐욕한 관중들이 아쉬운 밤 속으로 쏟아져갔다, 벼락 떨어진 자리엔 꽃잎 하나 한 술사의 목에서 돋아 완성되는 보름달은 채 보지도 못하고
물 건너는 사람, 세계사, 1992
김명인 시인 / 그대는 어디서 무슨 병(病) 깊이 들어
길을 헤매는 동안 이곳에도 풀벌레 우니 계절은 자정에서 바뀌고 이제 밤도 깊었다 저 수많은 길 중 아득한 허공을 골라 초승달 빈 조각배 한 척 이곳까지 흘려 보내며 젖은 풀잎을 스쳐 지나는 그대여 잠시 쉬시라 사람들은 제 살붙이에 묶였거나 병(病)들었거나 지금은 엿듣는 무덤도 없어 세상 더욱 고요하리니
축축한 풀뿌리에 기대면 홀로 고단한 생각 가까이에 흐려 먼 불빛 살갗에 귀에 찔러 오는 얼얼한 물소리 속 내 껴안아 따뜻한 정든 추억 하나 없어도 어느 처마 밑 떨지 않게 세워 둘 시린 것 지천에 널려
남은 길을 다 헤매더라도 살아가면서 맺히는 것들은 가슴에 남고 캄캄한 밤일수록 더욱 막막하여 길목 몇 마장마다 묻힌 그리움에도 채여 절뚝이며 지는 별에 부딪히며 다시 오래 걸어야 한다
동두천, 문학과지성사, 1979
김명인 시인 / 그리운 몽유(夢遊) 1
짧은 길이 제 힘을 다해 언덕 저쪽으로 키 낮은 처마들을 밀어붙이는 좁은 골목길 저편에 그대의 집이 있다 지붕 위의 안테나들이 거미줄 치듯 허공을 그어 놓은 가파른 언덕길이 잠깐의 현기증으로 기대 세우는 담벼락 어디서부턴가 나, 몽롱에 디딘 듯 어지럼 속을 더듬어 골목 저 켠으로 건너 가면 연기 속으로 부여잡는 손, 어디선가 추억의 저녁 밥 짓는 냄새 모든 철책들 덜컹거려 쪽문이 열리고 젊은 부인이 아이를 부를 때 우우 대답처럼 떨어지는 몇 송이의 성긴 눈발 그때 환청은 돋아나지 꿈의 시간인 양 이승은 그 배경으로 나앉지, 지주목 사이로 질척거리며 나, 바꾸어서 오랜 현실인 그대 몽유에서 헤맬 때 잠깐의 꿈 속을 환생이라 믿었던가 그렇다면 너무 긴 몽유여, 토막난 기억들이 빈틈없이 징검다리들 이어 놓아도 거기 빠져 버린 사랑도 이미 겪은 줄 가슴 미어지게 깨달아 다만 세상으로 통하는 좁은 골목 끝 아득한 그리움으로 서성거릴 뿐, 지붕 위로는 아직도 바람에 떠는 안테나들 사랑을 얻으면 세상을 얻는다고, 그런 때가 있었지 모든 부재에 세운 듯 한없이 나를 불러 돌아보면 텅 빈 골목, 벗어나면 나, 다시 어떤 몽유로 나아갈까
푸른 강아지와 놀다, 문학과지성사, 199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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