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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은교 시인 / 배추들에게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1.

강은교 시인 / 배추들에게

 

 

비 내리는 장터에 모여앉은

너희들을 본다.

옹기종기 쓰레기더미 위에 엎딘

너희들을 본다.

 

비바람에 푸른 살 찢기우고

목숨 꽂은 언 땅에서도 쫓겨나

탐욕의 비늘 낀 손 기다리는

아아 너희들

동강난 뿌리.

 

너희들은 울고 있다.

파도빛 이파리 허공에 악물어

펄럭펄럭 왼 동리에

눈물 섞어 휘날리며

허리춤엔 낙동강 흙내를

가슴께엔 두만강 솔바람을.

 

모가지여

이 비탈에도 눈이 오면

한 무더기씩 두 무더기씩

없는 피 쏟아내릴

모가지여

머리엔 흰눈이 내려

흰눈 펄펄펄 엎어져

 

천지에 흐느낌 괴는 지금은

어스름 저녁, 잔별도 돋지 않는.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강은교 시인 / 봄 무사(無事)

 

 

도시가 풀잎 속으로 걸어간다.

잠든 도시의 아이들이

풀잎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빨리빨리

지구로 내려간다.

 

가장 넓은 길은 뿌리 속

자네 뿌리 속에 있다.

 

허무집, 칠십년대 동인회, 1971

 

 


 

 

강은교 시인 / 붉은 강 1

 

 

가서는 안 옵니다.

그대는 물이 되었는지 또는

그림자가 되었는지

흔적도 없습니다.

 

뵈지 않는 하늘에다 목매달아

빼곡히 골목골목 어둠이 되어

 

그래 여긴 사철

눈물이 모래알들을 눕히는지요?

 

나무란 나무 가지마다

터럭이란 터럭 끝마다

피묻은 그림자 주렁주렁 열리는지요?

 

그대는 깊디깊은 강

슬픔들은 저녁 되어

그 누더기 옷을 벗으니

 

그대의 온몸은 빨갛게 물듭니다.

끝에서 다 쓰러진 꿈 하나

비틀거립니다

몰래 춤춥니다.

 

붉은 강, 풀빛, 1984

 

 


 

 

강은교 시인 / 새

 

 

자네, 여름에

타는 모래 위에서 보았어.

 

자네, 가을에

흔들리는 풀섶에 서 있었어.

 

겨울에 자네 그림자

내리는 눈 속에 펄럭이더니

 

지난 봄 피는 꽃 사이로

그리운 기침소리.

 

우리 여기 있노라

날개 결코 사라지지 않노라.

 

그런데 지금 어디

어느 황혼 허리 넘으며

 

청태(靑苔) 꿈밭에 애써

자네 핏방울 서너 점 뿌리고 있는가.

 

빈자일기, 민음사, 1977

 

 


 

강은교 시인

1945년 함남 홍원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바람 노래』,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등 다수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 『허무수첩』, 『추억제』, 『그물사이로』 등과 동화로 『숲의 시인 하늘이』, 『하늘이와 거위』 등이 있음.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과 1992년에는 제37회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