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박남수 시인 / 섬 1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7.

박남수 시인 / 섬 1

 

 

시푸런 남빛으로 설치며, 파도는

작은 섬을 핥으고 있지만,

실의(失意)에 낯익은 섬은

고독의 귀를 세워

어둠을 나는 갈매기의 절규(絶叫)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이 짧은 절규(絶叫)는, 결국

파도 소리에 지워져

그의 의사(意思)는 전달되지 않았지만,

언제나 비통(悲痛)의 소리는

이렇게 묵살(黙殺)되어 오지 않았던가,

세월이여,

세월이여.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소등(消燈)

 

 

1

 

나는 불을 끈다.

꿈꾸는 시간을 위해 나는 불을 끈다.

메마른 껍질로 둘러진 현실의 울타리 안에는

한 포기 풀도 자라지 못하는 가뭄의 뜰이 있고,

 

불모의 뜰에서는 뿌리도 타는 목마름과

비틀어진 가지에 마른 나뭇잎들이 보스라지고 있다.

나는 불을 끈다.

꿈꾸는 시간을 위하여 나는 불을 끈다.

 

2

 

불을 끈 시간의 끝에서

가뭄에 마른 현실의 시체에 꽃이 달리는

찬란한 화재를 위해 지피는 불길은

거인처럼 치솟아 꿈 속을 밝힌다.

 

요원의 그슬린 검은 잿더미 위에서

푸른 바다가 번져 가고

싱그러운 냄새가 뿜어 삼월의 뜰을 만드는

삼월의 사상(思想)을 위하여.

 

3

 

나는 불을 끈다.

꿈꾸는 시간을 위해 나는 지하 층계를 딛고 내려간다.

가는 물줄기는 어느 샘에 뿌리를 박고

질적질적 땅을 적시고 있다.

 

마른 뿌리는 가는 물줄기에 주둥이를 박고

지금 목을 축이고 있다.

나는 불을 끈다.

불을 켜는 시간을 위해 나는 불을 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소리

 

 

나의 귀를 스치어 가는

무슨 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통곡처럼 무너지는

그 장엄한 소리

아테네가 그랬듯이 폼페이가 또 그랬듯이

찬란한 존재들은

모두 무너지는 한때의 장엄한 시간을 가졌듯이

지금 무슨 수세(水勢) 같은 것에 밀리어

떨어지는 폭포처럼 장엄한 소리가 들린다.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면

역시 잠잠한 세상.

잠들은 자정에

바람의 칼날이 시푸렇게 번개치는

노한 거리 바닥에

달이 가리이는가, 집도 나무도 어둠의 자락으로

조용히 갈앉는 밤은 아직도 흐르고 있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박남수 시인 / 숨가쁜 언덕을 넘어

 

 

숨가쁜 언덕을 넘어

내리막길에서 다리가 휘청거린다.

죽음의 밝은 얼굴이 지켜보는

가을 어구에는, 억새풀들이

바람에 허리를 휘고 허우적인다.

금잔디는 파랗게 살았지만

죽음의 알몸이 여물어

송장냄새처럼 붉은 잠자리가

막대 끝에서 떨고 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시계는 열한시 오십구분

 

 

시계(時計)는 열한시 오십구분.

일분(一分)이 지나면 날이 바뀐다.

날이 바뀌어 본들 별일은 없지만

바뀌는 날에 기대(期待)를 걸어 본다.

기대를 걸어 본들 별일은 없지만

언제나 속으며 믿어 본다.

믿어 본들 별일은 없지만

시계(時計)는 열한시 오십구분.

일분(一分)이 지나면 새날이 된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신(神)의 쓰레기

 

 

천상(天上)의 갈매에서

부어 내리시는

부신 볕은

다시 하늘로 회수하지 않는

신의 쓰레기.

 

*

 

아침이면

비둘기가 하늘에

굴리면서

기억의 모이를

쪼고 있다.

다스한 신에 몸김을

몸에 녹이면서.

 

*

 

신의 몸김을

몸에 녹이면서

하루만큼씩 밀려서 버려지는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시인들은 종이 위에 버리면서

오늘도 다시

하늘로 귀소(歸巢)하는 비둘기.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박남수(朴南秀) 시인(1918.5.3-1994.9.17)

평양 출생. 숭실상고를 거쳐 1941년 일본 주오(中央)대학을 졸업. 초기에는 자연적 서경과 서정 속에서 절박한 감정을 은유적으로 환기하는 시를 썼으며, 후기에는 존재성을 규명하려는 주지적 경향을 가졌다.  유학 시절 제1회 <문장>지의 추천을 받은 김종한, 이용악 등과 사귀게 되면서, 그들의 권유로 <문장>지에 투고하였는데,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정지용에게 추천됨.  1940년에 첫 시집인 <초롱불>을 낸 이후 "갈매기 소묘" "새의 암장(暗葬)" 등 정갈하면서도 의식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시를 써 왔다. 미국에서 지낸 이국 생활의 외로움을 그린 <그리고 그 이후>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함. 1957년에는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장만영 등과 함께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했으며, 아시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1994년 6월에는 조국 통일에의 절실한 심경을 노래한 시 "꿈의 물감"으로 서울신문사가 제정한 공초(空超)문학상 (제2

회)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