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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상화 시인 / 구루마꾼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6.

이상화 시인 / 구루마꾼

 

 

`날마다 하는 남부끄런 이 짓을

너희들은 예사롭게 보느냐?'고

웃통도 벗은 구루마꾼이

눈 붉혀 뜬 얼굴에 땀을 흘리며

아낙네의 아픔도 가리지 않고

네거리 위에서 소 흉내를 낸다.

 

월간 『開闢(개벽)』  1925. 5

 

 


 

 

이상화 시인 / 그날이 그립다

 

 

내 생명의 새벽이 사라지도다

그립다 내 생명의 새벽―설워라 나 어릴 그때도 지나간 검은 밤들과 같이 사라지려는도다

성녀의 피수포(被首布)처럼 더러움의 손 입으로는 감히 대이기도 부끄럽던 아가씨의 목―

젖가슴빛 같은 그때의 생명!

 

아 그날 그때에는 낮도 모르고 밤도 모르고 봄빛을 머금고 움 돋던 나의 영(靈)이

저녁의 여울 위로 곤두치는 고기가 되어

술 취한 물결처럼 갈모로 춤을 추고 꽃심의 냄새를 뿜는 숨결로 아무 가림도

없는 노래를 잇대어 불렀다

 

아 그날 그때에는 낮도 없이 밤도 없이 행복의 시내가 내게로 흘러서 은칠한 웃음을 만들어 내며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았고 눈물이 나와도 쓰린 줄 몰랐다

내 목숨의 모두가 봄빛이기 때문에 울던 이도 나만 보면 웃어들 주었다

 

아 그립다 내 생명의 새벽―설워라 나 어릴 그때도 지나간 검은 밤들과 같이

사라지려는도다

오늘 성경 속의 생명수에 아무리 조촐하게 씻은 손으로도 감히 만지기에 부끄럽던 아가씨의 목―젖가슴 빛 같은 그때의 생명!

 

상화와 고월, 미발표, 1951

 

 


 

 

이상화 시인 / 극단

 

 

펄떡이는 내 신령이 몸부림치며

어제 오늘 몇 번이나 발버둥질하다

쉬지 않는 타임은 내 울음 뒤로

흐르도다 흐르도다 날 죽이려 흐르도다.

 

별빛이 달음질하는 그 사이로

나뭇가지 끝을 바람이 무찌를 때

귀뚜라미 왜 우는가 말없는 하늘을 보고?

이렇게도 세상은 야밤에 있어라.

 

지난해 지난날은 그 꿈 속에서

나도 몰래 그렇게 지나 왔도다

땅은 내가 디딘 땅은 몇 번 궁굴려

아 이런 눈물 골짝에 날 던졌도다.

 

나는 몰랐노라 안일한 세상이 자족에 있음을

나는 몰랐노라 행복된 목숨이 굴종에 있음을

그러나 새 길을 찾고 그 길을 가다가

거리에서도 죽으려는 내 신령은 너무도 외로워라.

 

자족 굴종에서 내 길을 찾기보담

남의 목숨에서 내 사리를 얽매기보담

오 차라리 죽음―죽음이 내 길이노라

다른 나라 새 사리로 들어갈 그 죽음이!

 

그러나 이 길을 밟기까지는

아 그날 그때가 가장 괴롭도다

아직도 남은 애닯음이 있으려니

그를 생각는 그때가 쓰리고 아프다.

 

가서는 오지 못할 이 목숨으로

언제든지 헛웃음 속에만 살려거든

검아 나의 신령을 돌멩이로 만들어 다고

개천 바닥에 썩고 있는 돌멩이로 만들어 다고.

 

월간 『開闢(개벽)』  1925. 5

 

 


 

 

이상화 시인 / 금강송가(金剛頌歌)

― 중향성(衆香城) 향나무를 더우잡고

 

 

금강! 너는 보고 있도다―너의 정위(淨偉)로운 목숨이 엎디어 있는 가슴―중향성 품 속에서 생각의 용솟음에 끄을려 참회하는 벙어리처럼 침묵의 예배만 하는 나를!

 

금강! 아, 조선이란 이름과 얼마나 융화된 네 이름이냐. 이 표현의 배경 의식은 오직 마음의 눈으로만 읽을 수 있도다. 모―든 것이 어둠에 질식되었다가 웃으며 놀라 깨는 서색(曙色)의 영화와 여일(麗日)의 신수(新粹)를 묘사함에서―게서 비로소 열정과 미의 원천인 청춘―광명과 지혜의 자모(慈母)인 자유―생명과 영원의 고향인 묵동(黙動)을 볼 수 있으니 조선이란 지오의(指奧義)가 여기 숨었고 금강이란 너는 이 오의(奧義)의 집중 통각에서 상징화한 존재이어라.

 

금강! 나는 꿈 속에서 몇 번이나 보았노라. 자연 가운데의 한 성전인 너를―나는 눈으로도 몇 번이나 보았노라. 시인의 노래에서 또는 그림에서 너를―하나, 오늘에야 나의 눈 앞에 솟아 있는 것은 조선의 정령이 공간으론 우주 마음에 촉각이 되고 시간으론 무한의 마음에 영상이 되어 경이의 창조로 현현(顯現)된 너의 실체이어라.

 

금강! 너는 너의 관미(寬美)로운 미소로써 나를 보고 있는 듯 나의 가슴엔 말래야 말 수 없는 야릇한 친애와 까닭도 모르는 경건한 감사로 언젠지 어느덧 채워지고 채워져 넘치도다. 어제까지 어둔 사리에 울음을 우노라―때아닌 늙음에 쭈그러진 나의 가슴이 너의 자안(慈顔)과 너의 애무로 다리미질한 듯 자그마한 주름조차 볼 수 없도다.

 

금강! 벌거벗은 조선―물이 마른 조선에도 자연의 은총이 별달리 있음을 보고 애틋한 생각―보배로운 생각으로 입술이 달거라―노래 부르노라.

 

금강! 오늘의 역사가 보인 바와 같이 조선이 죽었고 석가가 죽었고 지장미륵(地藏彌勒) 모든 보살이 죽었다. 그러나 우주 생성의 노정을 밟노라―때로 변화되는 이 과도 현상을 보고 묵은 그 시절의 조선의 얼굴을 찾을 수 없어 조선이란 그 생성 전체가 죽고 말았다―어리석은 말을 못하리라. 없어진 것이란 다만 묵은 조선이 죽었고 묵은 조선의 사람이 죽었고 묵은 네 목숨에서 곁방살이하던 인도의 모든 신상이 죽었을 따름이다. 항구한 청춘―무한의 자유―조선의 생명이 종합된 너의 존재는 영원한 자연과 미래의 조선과 함께 길이 누릴 것이다.

 

금강! 너는 사천여 년의 오랜 옛적부터 퍼붓는 빗발과 몰아치는 바람에 갖은 위협을 받으면서 황량하다 오는 이조차 없던 강원의 적막 속에서 망각 속에 있는 듯한 고독의 설움을 오직 동해의 푸른 노래와 마주 읊조려 잊어버림으로 서러운 자족을 하지 않고 도리어 그 고독으로 너의 정열을 더욱 가다듬었으며 너의 생명을 갑절 북돋우었도다.

 

금강! 하루 일찍 너를 못 찾은 나의 게으름―나의 둔각이 얼마만치나 부끄러워, 죄로워 붉은 얼굴로 너를 바라보지 못하고 벙어리 입으로 너를 바로 읊조리지 못하노라.

 

금강! 너는 완미한 물(物)도 허환(虛幻)한 정(精)도 아닌―물과 정의 혼융체 그것이며, 허수아비의 정(靜)도 미쳐 다니는 동(動)도 아닌―정과 동의 화해기 그것이다. 너의 자신이야말로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영혜(靈慧) 가득 찬 계시이어라. 억대조겁(億代兆劫)의 원각(圓覺)덩어리인 시편이어라. 만물상이 너의 혼융에서 난 예지가 아니냐. 만폭동이 너의 지해(知諧)에서 난 선율이 아니냐. 하늘을 어루만질 수 있는 비로(毘盧)―미륵이 네 생명의 승앙(昇昻)을 보이며 바다 밑까지 꿰뚫은 팔담(八潭), 구룡이 네 생명의 심삼(深滲)을 말하도다.

 

금강! 아, 너 같은 극치의 미가 꼭 조선에 있게 되었음이 야릇한 기적이고 자그마한 내 생명이 어찌 내 애훈(愛熏)을 받잡게 되었음이 못 잊을 기적이다. 너를 예배하러 온 이 가운데는 시인도 있었으며 도사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인들은 네 외포미(外包美)의 반쯤도 부르지 못하였고 그 도사들은 네 내재상(內在想)의 첫길에 헤매다가 말았다.

 

금강! 조선이 너를 뫼신 자랑―네가 조선에 있는 자랑―자연이 너를 낳은 자랑―이 모든 자랑을 속 깊이 깨치고 그를 깨친 때의 경이 속에서 집을 얽매고 노래를 부를 보배로운 한 정령이 미래의 조선에서 나오리라, 나오리라.

 

금강! 이제 내게는 너를 읊조릴 말씨가 적어졌고 너를 기려 줄 가락이 거칠어져 다만 내 가슴 속에 있는 눈으로 내 마음의 발자욱 소리를 내 귀가 헤아려 듣지 못할 것처럼―나는 고요로운 이 황홀 속에서―할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은 손자와 같이 예절과 자중을 못 차릴 네 웃음의 황홀 속에서―나의 생명, 너의 생명, 조선의 생명이 서로 묵계(黙契)되었음을 보았노라. 노래를 부르며 가벼우나마 이로써 사례를 아뢰노나. 아, 자연의 성전이여! 조선의 영대(靈臺)여!

 

여명, 1925. 9

 

 


 

이상화 [李相和, 1901.4.5~1943.4.25] 시인

1901년 대구(大邱)에서  출생.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 경성 중앙학교에서  수학. 1921년 『백조』 동인으로 참가하여 「單調」, 「가을의 風景」, 「末世의 欷嘆」을 발표하며 등단. 일본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 및 프랑스문학을 공부하고  1924년  귀국. 《개벽》誌를 중심으로 시·소설·평론 등을  발표하고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에 가담.  《개벽》, 《문예운동》, 《여명》, 《신여성》, 《삼천리》, 《별건곤》, 《조선문단》, 《조선지광》 등의 동인. 시인이며 작가, 독립운동가, 문학평론가, 번역문학가, 교육자, 권투 선수로도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