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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두진 시인 / 식민지(植民地), 20년대(年代) 춘궁(春窮)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7.

박두진 시인 / 식민지(植民地), 20년대(年代) 춘궁(春窮)

 

 

삼동을 벗어나면 춘궁이었다.

길고도 아득한 굶주림이 기다렸다.

하늘도 햇볕도 허기로 타오르고

흙덩어리 팍팍한 황토의 목메임.

마을은 기진한 채

죽은 듯 늘어져 잠잠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바라볼 것도 기다릴 것도 없었다.

아홉 굽이 창자마다 쪼로록거리는 울음

어질뜨려 노오랗게 하늘과 땅이 핑핑 돌고

한낮에 오슬오슬 소름 돋치는 신열

아무데나 주저앉아 이명소리 견디고

이마에는 진땀,

정신이 돌면 또 한 번씩

허리띠 끈을 졸라맸다.

 

띄엄띄엄한 20호 미만의 고장치기

영세 소작의 극빈자

분노도 원망도

체념조차도 사치로워 죽지 못해서 사는 채로

그냥 살고 그냥 굶으며 시들어 갔다.

 

특권 지주 수탈의 원흉 동양척식회사

군림하는 그 이민

백색 흡혈귀에게

소작료로 비료값으로 장리쌀로 빼앗기고

키 까불러 알곡으로만 몇 곱절씩 빼앗기고

고리채로 또 되묶이고 덜미를 잡혀 졸리우는

피와 땀의 무한 농노 죽어지지도 않았다.

 

석복이네도 그랬다.

길영이네도 그랬다.

재돌이네도 동방삭이네도

쇠돌이네도 그랬다.

 

조당수 묽은 죽에 얼굴 어려 비치고

비료용의 콩깨묵 죽, 스래기 죽,

그것마저 바닥이 나면

씨오쟁이를 털었다.

 

어린아기 젖이 안 나 지쳐 잠들고

영양실조 기갈증

성인들은 부황이 들어

누렇게 부어서 비틀댔다.

 

어머님, 어머님,

반듯하고 너른 이마 둥글고 큰 눈

그때 우리 어머님은 수심에 찬 얼굴

단정하게 무릎 위에 바느질감 드시고

긴긴 해를 말이 없이 삯바느질만 하셨다.

 

누비질로는 골의 으뜸

이따금씩 찾아오는

누비옷을 맡으면

이불 한 채에 얼마

바지 저고리에 얼마

좁쌀 사고

월사금 내고

제사상도 차리셨다.

 

하루 한 끼 죽, 혹은 두 끼 죽,

다른 식구 거둬 주고 스스로는 늘 줄여

눈 침침하고 손 떨리고

현기증이 나면,

나 몰래 식구 몰래

가만가만 걸어 나가 장독대로 가서

맨간장물

물에 타서 훌훌 마시셨다.

 

아으 그래도 사람들은 죽지 않으면 살았다.

풀이 나면 풀을, 잎이 나면

잎을 뜯어

들, 산, 아무데나

먹을 것을 찾아 헤매었다.

 

질경이, 쑥, 명아주, 비듬,

아욱, 시금치, 쑥갓, 부루,

산에서는 고사리, 취, 뚝깔, 원추리,

먹는 풀은 무엇에고

좁쌀 한 줌 넣고

시퍼렇게 죽을 쑤어 끼니를 때웠다.

 

왜 가난한지

왜 굶는지

누가 못살게 하는지

일인들이 무엇인지

왜 그들이 지주로서 착취해 가고

왜 우리는 소작인으로서 착취를 당하는지

팔자소관 운명의 탓

살다가 그대로 죽어가는

20년대의 식민지,

벌판 마을 고장치기는

외롭고 또 아득했다.

 

눈물과 땀

피와 살점

골수까지 빨아 가던

제국주의 아귀

 

기름진 땅 알곡

좋은 것은 빼앗기고 나쁜 것마저도 잃어

아무것도 손에 없이 시름시름 죽어 간

잡혀 가고 쫓겨 가고

굶주려서 죽어 간,

조선 팔도 삼천만

무한 농노 너무 착한 우리들의 넋.

 

포옹무한(抱擁無限), 범조사, 1981

 

 


 

 

박두진 시인 / 신약(新約)

 

 

만(萬)년 뒤에도 억(億)년 뒤에도

우린 그때 그렇게 있을 것이라 한다.

모두는 끝나고

바다와 하늘뿐인

뙤약볕 사막벌의 하얀 뼈의 너

희디 하얀 뼈로 나도 너의 곁에 누워

사랑해, 사랑해,

서로 오래 하늘 두고 맹서해 온 말

그 가슴의 말 되풀이해 파도 소리에 씻으며

영겁을 나란하게

바닷가에 살아

우린 그때 그렇게 있을 것이라 한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3

 

 


 

 

박두진 시인 / 야생대(野生代)

 

 

왕성한 혈기의 표범들이 밀림을 뛰고 있다.

쫓기는 사슴을 덮쳐서 골짜기에 뉘어 놓고

뜨거운 선혈의 살점을 뜯고 있다.

영원을 무료히 내려 쬐는 한낮의 땡볕

한 자락 바람도 숲에는 일지 않고

뻑뻑구욱 뻑뻑구욱

핏덩어리 토해 내며 뻐꾹새만 울고 있다.

 

야생대(野生代), 일조각, 1977

 

 


 

 

박두진 시인 / 어떤 노을

 

 

우박비 자욱하게 쏟아지고 그치고,

번갯불 불 붙어 팔팔대고 그치고,

우릉우릉 천둥소리 우릉대고 그치고,

 

믿었던 모두는 도망하고 잠적하고,

믿었던 모두는 배반하고 떠나고,

 

멀디 먼,

당신이 홀로서 걸어가는 벌판에 노을이 젖어 있다.

벌판이 끝없이 바다로 이어지는

홀로서 걸어가는 당신의 전신이 노을에 젖어 있다.

 

노을은 주황빛, 보랏빛,

그 속의 장미빛, 그 속의 진달래빛, 그 속의 황금빛,

혹은 그 속의 선혈빛 임리히,

 

홀로서 걸어가는 당신의 발자국을 물들이고,

홀로서 안고 가는 당신의 젖빛 꿈을 물들이고,

홀로서 울고 가는 당신의 눈물을 물들이고,

 

벌판엔,

뜨겁게 분출하던 어제의 만세 소리

내일의 함성 소리

이젠 없고,

 

다만

떼지어 뒤를 쫓는 이리 울음 들릴 뿐,

당신이 들고 가는

찢어진 기폭 하나 바람에 펄럭인다.

 

그 우박비 그치고 적막하고,

번갯불 그치고 적막하고,

천둥 소리 그치고 적막하고,

 

저녁 해 곤두박혀 바다에

별은 아직 돋지 않고

노을로 불타는 주황빛 하늘 땅,

 

홀로서 걸어가는 당신의 벌판에 노을이 젖어 있다.

벌판을 홀로 가는 당신의 전신이 노을에 젖어 있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4

 

 


 

 

박두진 시인 / 오도(午禱)

 

 

백(百) 천만(千萬) 만만(萬萬) 억(億)겹

찬란한 빛살이 어깨에 내립니다.

 

자꾸 더 나의 위에

압도(壓倒)하여 주십시요.

 

이리도 새도 없고,

나무도 꽃도 없고,

쨍 쨍, 영겁(永劫)을 볕만 쬐는 나 혼자의 광야(曠野)에

온 몸을 벌거벗고

바위처럼 꿇어,

귀, 눈, 살, 터럭,

온 심혼(心魂), 전(全) 영(靈)이

너무도 뜨겁게 당신에게 닳습니다.

너무도 당신은 가차이 오십니다.

 

눈물이 더욱 더 맑게 하여 주십시요.

땀방울이 더욱 더 진하게 해 주십시요.

핏방울이 더욱도 곱게 하여 주십시요.

 

타오르는 목을 축여 물을 주시고,

피 흘린 상처(傷處)마다 만져 주시고,

기진한 숨을 다시

불어 넣어 주시는,

 

당신은 나의 힘.

당신은 나의 주(主).

당신은 나의 생명(生命).

당신은 나의 모두.……

 

스스로 버리려는

벌레 같은 이,

나 하나 끓은 것을 아셨습니까.

뙤약볕에 기진(氣盡)한

나 홀로의 핏덩이를 보셨습니까.

 

오도(午禱), 영웅출판사, 1954

 

 


 

박두진[朴斗鎭, 1916.3.10 ~ 1998.9.16] 시인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誌를 통해 등단.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3인 합동시집 『靑鹿集(청록집)』(을유문화사, 1946)을 간행한 뒤 첫 개인시집 『해』를 출간. 이후 『오도』, 『거미와 성좌』, 『인간밀림』, 『고산식물』, 『사도행전』, 『수석열전』, 『속 수석열전』, 『야생대』, 『포옹무한』, 『빙벽을 깬다』 등의 시집과 시론집 『시와 사랑』, 『한국현대시론』 등을 간행. 3.1문화상 예술상, 인촌상, 지용문학상, 외솔문학상, 동북아기독문학상 등을 수상. 연세대에서 정년퇴임 후 단국대와 추계예대에서 후학 양성. 1998년에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