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시인 / 성숙(成熟)
가장 가까우나 무한거리 사철을 방황하는 가장 가난한 나의 꿈이, 비로소 오늘 네게서 포만하고 바람이 처음 열어 보는 오월의 넋의 비밀 안에서 포화하는 꽃벌음이어. 저 아침의 한낮의 달밤의 그 바다의 첫번 팽창 아직은 저절로 유지되는 위태로운 균형이 네 순수 체온, 황홀하고 미끄러운 허릿매로 내 앞에 누워 있다.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성처녀(聖處女)
금빛 햇덩어리의 마음으로 푸르디 푸른 오월 바람결의 마음으로 혼자서 흐느끼는 여울물의 마음으로 너를 굽어보고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끌어안고 볼 비비고 따뜻하게 가슴 품고 방황하며 있었다. 짐승 소리 들렸다 이리 늑대 말승냥이 소리 개호주 살가지 칡덕범 소리 들개 호박개 불여우 소리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꽃은 꽃으로 피는 피로 짓이겨 낮에도 달밤에도 울음 울었다. 저희끼리 으르렁이며 피를 흘렸다. 오직 내 끓는 심장의 뜨거움 혈조의 싱싱함으로 하얗게 눈부시게 백열한 사랑 영혼의 푸른 높이 쏘는 눈 윙윙대는 날개의 사랑으로 더 깊고 그윽한 산의 가슴 바다 가슴으로 다만 작은 아기 내 넋의 전부 불멸의 마리아로 너를 안았었다.
속 수석열전(續水石列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속의 해
푸른 달밤의 가마귀떼 훠이훠이 쫓는다. 낮에도 나타나는 도깨비 양의 탈의 이리 변절의 박쥐 올빼미 부엉부엉 부엉이떼 훠이훠이 쫓는다. 햇살로 엮어 만든 빗자루 훠이훠이 쳐 두들겨 밤의 악령 쫓는다. 죽음과 그 그림자 잿빛 회의 칠흑의 절망 첩첩 밤의 날개 쫓는다.
꽃으로 서서 우는 눈물 신록의 바람과 햇살로 흔들리는 살의 나신 뜨거운 선의 흐름 영혼의 열의 향기 사랑이 그 꿈을 꿈이 승리를 승리가 영원을 보장하는 시 시의 집권 시의 평화 시의 환희 로 활활 타는 너의 속의 시 불멸의 속의 해의 너와 나는 하나 신나라 아 하나의 해 우주 영원 탄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3
박두진 시인 / 수석(水石) 회의록(會議錄)
돌밭의
돌들이 날더러 비겁하다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어리석다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실망했다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눈물 흘리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피 흘리라고 한다.
돌들이 일제히 주먹질한다. 돌들이 일제히 욕설 퍼붓는다. 돌들이 나를 향해 돌을 던진다.
돌들이 다시 또
돌들이 날더러 일어설 것이냐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도망할 것이냐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숨어 버릴 것이냐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분노하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불질러 보라고 한다. 어둠에.
돌들이 날더러 또 사자가 되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독수리가 되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말승냥이가 되라고 한다. 차라리. 돌들이 날더러 표범이 되라고 한다. 차라리.
돌들이 날더러 학이나 비둘기 사슴이나 산양이 되라고 한다. 차라리.
아, 돌들이 이번에는
돌들이 날더러 하늘의 별들을 따 와 보라고 한다. 햇덩어리 이글대는 이글대는 햇덩어릴 쏘아 떨어뜨려 보라고 한다. 저 달의 달그림자 눈물의 얼음벌을 쏘아 떨어뜨려 보라고 한다.
돌들이 또 날더러 바다 위로 쩔벙쩔벙 걸음 걸어와 보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돌로써 빵을 빚고 손으로 돌을 쳐 콸콸 솟는 샘물 모세처럼 돌에서 샘물을 솟게 해 보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이런 소리 끝까지 듣고 있는 바보 돌들이 날더러 바보가 아니냐고
돌들이 날더러 돌이나 되라고 돌이나 되라고 한다.
그렇게 내가 손들고 일어서서 진실로 한 점 돌이 될 것을 선언하자,
이제 천천만 돌들의
그 돌 속의 불, 돌 속의 물, 돌 속의 빛, 돌 속의 얼음, 돌 속의 시, 돌 속의 꿈, 돌 속의 고독, 돌 속의 눈물, 돌 속의 참음, 돌 속의 힘, 돌 속의 저항, 돌 속의 의지, 돌 속의 평화, 돌 속의 사랑, 돌 속의 자유, 돌 속의 우주, 돌 속의 환희 있는 것 일체 모두 하나로 엉겨,
하늘 천지 땅 천지 둥둥 뜨는 함성 만세 만세 돌들의 외침 끝이 없었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4
박두진 시인 / 시집(詩集)
푸른 바닷가 모래벌에 시집 하나 하얗게 펼쳐지고 있었다. 바람이 펄럭펄럭 한 장씩의 책장을 넘겨 가고 있었다. 슬프고 아름다운 가슴이 찍혀 있는 따스한 시집 글자 그 활자들이 새가 되어 날아오르고 있었다. 한 마리 또 한 마리 백 마리 천 마리 높이높이 가물거려 하늘 속에 잠기는 하얀 새의 시, 하얀 시의 새. 꽃잎들이 하들하들 지고 있었다. 새가 되어 하늘에서 시를 외던 새가 그 외던 시 잊어버려 못 외었기 때문 꽃이 되어 바다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먼 먼 하늘 속의 별이 되고 있었다. 새가 되어 하늘에서 시를 외던 새가 슬프고 아름다운 이 세상의 시 그 시집의 시 낭랑히 다 외어 냈기 때문 별의 나라 별이 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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