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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남수 시인 / 새의 암장(暗葬) 1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6.

박남수 시인 / 새의 암장(暗葬) 1

 

 

삶보다 투명한 궤적을 그으며

한 마리의 새는

저승으로 넘어가고 있다.

죽음과 생식의 알이 쏟아지는

보이는 싸움과 보이지 않는

싸움 속에서 암장되고 있다.

스스로가 노래인 하늘의 주민들은

붕 붕 날리는 위협으로

온몸에 소름을 쓰고 떨고 있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새의 암장(暗葬) 2

 

 

침묵을 터뜨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새들은 떼를 지어

순금의 깃을 치며 멀어져 갔다.

 

물낯에 그려진 무수한 동그라미가

하나씩 허무로 꺼져 갔다.

 

붉은 피가 풀어져

다시 푸르러지는 일순(一瞬)을

누구도 보지 못하였지만, 다만

어디선가 아픈 절규가 검게 떨어져,

 

갈대밭이 수런거리고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침묵을

완전히 뒤엎고, 하늘의 표류물이 강반(江畔)을

피로 적시는 것을 보았으리라.

 

모든 위험을 잊어버린, 새는

죽음의 점토에 떨어져

스스로를 한 폭의 판화로 찍고 있었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새의 암장(暗葬) 3

 

 

땅 속을 자맥질하던

한 쭉지의 날개는

삼천년의 계절을 넘어서, 지금

이승 쪽으로 떠오르고 있다.

 

고구려의 하늘이었을까, 아니면

예맥의 하늘이었을까

부릉 날아오른 활촉에

꿰뚫린 것은 새가 아니라, 그것은

죽음에 앞지른 절규,

일순(一瞬) 후에

새는 피를 쓰고 곱게 낙하하였다.

 

땅에 떨어져 내린

한 쭉지의 날개는 지하로 강하(降下)하여

어느 지층을 날아가고 있었다.

 

피를 앞지른 절규.

사람의 귀에 세운 불립문자(不立文字).

 

화석은 어느 표본실

유리창 속에서 증언하고 있다.

 

죽음을 앞지른 절규는

삼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어느 십자로에서

나이 어린 소년의 붉은 입술에서

어느 전장터에서

꽃다운 젊은이의 목덜미에서

 

지금도 귀먹은 사람의 귀에

불립분자(不立文字)를 세우고 있다.

 

어두운 삼천년의 세월을

자맥질해 온 한 쭉지의 날개는

지금 어느 표본실에서 증언하고 있지만

귀먹은 사람의 귀로는 듣지 못한다.

 

무수한 죽음을 앞지른 절규는

긴 계절의 저쪽에서 화석하여

선명한 쭉지의 무늬를 만들고 있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생성(生成)의 꽃

 

 

1

 

무구한 빛.

피를 흘리는 젊음의 뒤안길에서

꽃이 피고

흐르는 꽃잎․꽃잎․꽃잎

 

꽃이 피고

피가 흐르는 아픔을

흐르는 피로 맺는

생성의 꽃, 꽃밭에서,

 

불로 타는

붉은 빛깔로 부르는

무구한 빛.

 

아픔이 없이는

이루지 못하는 뒤안길에서

피로 꽃이 피고 꽃이 지고……

 

2

 

꽃밭에 도사린

꽃뱀이 곱게 도사리고

어디로 쏘아 가려나.

팽팽히 당겨진 탄력의 대가리.

 

한 번 겨누면

구멍이 뚫어지는 독,

독의 누런 진으로 풍기는

흰 백합의 축축한 향,

 

향이 흐르는 꽃밭에

덮씌운 꽃문(紋)도 아름다운

이불 속에서,

 

그 어둠의 단층

어디메쯤 맺혔을 것이다.

생성의 수염, 수염이.

 

3

 

바람이 분다. 모두 귀를 기울이고

흔들린다. 하늬바람 마파람,

푸름의 물결이 일렁이는 속에서

색깔들이 엇갈려 흔들린다.

 

소나기가 때리는

뇌성. 뇌성에 터지는

번개. 번갯불에 어린

가녀린 꽃.

 

꽃. ……꽃은

역시 피어 있었다.

그 떨리는 낙화에 묻혀―

 

죽음 앞이면

오히려 살아나는 꽃잎 위에

이윽고 강한 햇볕이 어리었다.

 

4

 

무지개의 이슬이 맺힌

꽃밭 한켠에

쏟아지는 주먹비에 터진, 개구리는

눈을 외면하고 있었다.

 

떨어지는 꽃잎이 하나 둘.

꽃 그림자에 놀란 개구리는

껑충 앞으로 한 번 뛴다.

뛰면서 보는 건 신라쯤인가.

 

뛸 제마다 흔들리는 눈으로

기실은 작아만 가는

그 상거(相距)의 거리가 멀어만 간다.

 

개굴 깨굴 깻굴

꼬부라진 꽃밭 사잇길에서

갸웃 흔들리는 바람에 벙그는 또 한 가지의 꽃.

 

5

 

아직은 무구한 빛

피를 흘리리라.

옆구리에 터진 상채기에 붉은 꽃송아리를 달고

아픔으로 여기에 서 있다.

 

사흘 후에는

조그만 징조(徵兆)로 맺힌 씨앗이

푸르름 속에 태동하는 조용한 시간 위에서

스스로의 우주를 세우고 있었다.

 

꽃이 지고

잎이 지고

줄기가 메마른 것은,

스스로의 우주에

다시 생성의 꽃을 피우고

잎을 달기 위해서였다.

 

매기 소묘(素描), 춘조사, 1958

 

 


 

 

박남수(朴南秀) 시인(1918.5.3-1994.9.17)

평양 출생. 숭실상고를 거쳐 1941년 일본 주오(中央)대학을 졸업. 초기에는 자연적 서경과 서정 속에서 절박한 감정을 은유적으로 환기하는 시를 썼으며, 후기에는 존재성을 규명하려는 주지적 경향을 가졌다.  유학 시절 제1회 <문장>지의 추천을 받은 김종한, 이용악 등과 사귀게 되면서, 그들의 권유로 <문장>지에 투고하였는데,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정지용에게 추천됨.  1940년에 첫 시집인 <초롱불>을 낸 이후 "갈매기 소묘" "새의 암장(暗葬)" 등 정갈하면서도 의식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시를 써 왔다. 미국에서 지낸 이국 생활의 외로움을 그린 <그리고 그 이후>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함. 1957년에는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장만영 등과 함께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했으며, 아시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1994년 6월에는 조국 통일에의 절실한 심경을 노래한 시 "꿈의 물감"으로 서울신문사가 제정한 공초(空超)문학상 (제2

회)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