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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두진 시인 / 붉은 부리의 새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5.

박두진 시인 / 붉은 부리의 새

 

 

바람보다도 가볍게

햇살보다도 더 부드럽게

영혼의 네 날개

가을 하늘 훨훨 지는 쭉지 갈이 깃

기억할 수 있는 것의 모두는

강물에 둥둥 떠서 바다로 멀어가고

안에 받은 상처

피 뛰어 머나먼 별과 별의 불로 타

다만

당신의 기억하심

기억하심 당신 안의 하ㅎ지 않은 삶

어느만큼 삶의 의미 알아 주실지

가을 강 저 볕에 우는

부리 붉은 새.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4

 

 


 

 

박두진 시인 / 비(碑)

 

 

―한 마리만 푸른 새가 날아 오르라. 비(碑).…… 한 마디만 길다랗게 소릴 뽑으라.

 

천년(千年) 이천년(二千年)을 삼천년(三千年)을 조으는 것, 이끼마다 눈이 되어 꽃잎으로 피라. 이슬처럼 꽃잎마다 녹아 흐르면, 아득한 하늘 밖에 별이 내린다.

 

비(碑). 오오, 돌.…… 무엇을 호흡(呼吸)하는가. 오래 숨이 겹쳐지면 깃쭉지가 돋는가. 목을 뽑아 학(鶴)처럼 구름 밖도 나는가. 비바람과 눈포래와 내려 쬐는 뙤약볕. 미쳐 뛰는 세월(歲月)들이 못을 박는다. 징을 박는다.

 

―월광(月光).…… 또는, 별이 글성 배어 내려, 거울처럼 맑아지면 다시 네게 오마. 넌즛 한번 내어밀어 손을 쥐어 다오. 벌에 혼자 너를 두고 훌훌 내가 간다.

 

오도(午禱), 영웅출판사, 1954

 

 


 

 

박두진 시인 / 사도행전(使徒行專) 2

 

 

1

 

카인이 돌아가면 혼자였었네.

몇 개의 돌덩이와

흔들리는 쑥대

들리는 듯 멀리서 바다가 울고 오고

바람은 은색

피로 땅에 스미면서 혼자였었네.

 

당신은 없었네.

늦게 해가 허릴 굽혀

이마를 와 짚어 주고

주저앉아 멀리서 카인의 울음

그 울음 멀어 가면

혼자였었네.

 

2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어디론가 웅성대며 몰려가는 소리

벼랑을 돌아가면

혼자였었네.

 

날아오던 돌의 소리, 아우성 소리,

미친 듯

그, 바다로 비탈길로 내리닫던 군중

당신들을 피해가면 혼자였었네.

 

더러는 창을 들고

더러는 침을 뱉고

더러는 싱긋 웃고 곁을 와서 끼던

아, 보고 싶은 이웃

벼랑을 돌아가면 혼자였었네.

바다 멀리 푸른 데서

혼자였었네.

 

사도행전(使徒行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삼(三)월 일(一)일의 하늘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삼(三)월 하늘에 뜨거운 피무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대지에 뜨거운 살과 피가 젖어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겨레는 우리들의 겨레

우리들의 자유는 우리들의 자유이어야 함을 알았다.

 

아,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우리들의 가슴 깊이 피 터져 솟아나는

비로소 끓어오르는 민족의 외침의 용솟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억눌림, 우리들의 비겁을

피로써 뚫고 일어서는

절규하는 깃발의 뜨거운 몸짓을 알았다.

 

유관순 누나는 저 오르레안, 쨘다르끄의 살아서의 영예

죽어서의 신비도 곁들이지 않은

수수하고 다정한 우리들의 누나,

휜옷 입은 소녀의 불멸의 순수

아, 그 생명혼의 고갱이의 아름다운 불길의

영웅도 신도 공주도 아니었던

그대로의 우리 마음 그대로의 우리 핏줄

일체의 불의와 일체의 악을 치는

민족애의 순수 절정 조국애의 꽃넋이다.

 

아, 유관순, 누나, 누나, 누나, 누나,

언제나 삼(三)월이면 언제나 만세 때면

잦아 있는 우리 피에 용솟음을 일으키는

유관순 우리 누난 보고 싶은 누나

그 뜨거운 불의 마음 내 마음에 받고 싶고

내 뜨거운 맘 그 맘 속에 주고 싶은

유관순 누나로 하여 우리는 처음

저 아득한 삼(三)월의 고운 하늘

푸름 속에 펄럭이는 피깃발의 외침을 알았다.

 

인간밀림(人間密林), 일조각, 1963

 

 


 

 

박두진 시인 / 성(聖) 고독(孤獨)

 

 

쫓겨서 벼랑에 홀로일 때

뿌리던 눈물의 푸르름

떨리던 풀잎의 치위를 누가 알까

 

땅바닥 맨발로 넌즛 돌아

수줍게 불러 보는 만남의 가슴 떨림

해갈의 물동이

눈길의 그 출렁임을 누가 알까

 

천 명 삼천 명의 모여드는 시장끼

영혼의 그 기갈소리 전신에 와 흐르는

어떡할까 어떡할까

빈 하늘 우러르는

홀로 그때 쓸쓸함을 누가 알까

 

하고 싶은 말

너무 높은 하늘의 말 땅에서는 모르고

너무 낮춘 땅의 말도

땅의 사람 모르고

이만치에 홀로 앉아 땅에 쓰는 글씨

그 땅의 글씨 하늘의 말을 누가 알까

 

모닥불 저만치 제자는 배반하고

조롱의 독설,

닭울음 멀어 가고

군중은 더 소리치고

다만 침묵

흔들리는 안의 깊이를 누가 알까

 

못으로 고정시켜

몸 하나 매달기에는 너무 튼튼하지만

비틀거리며

어깨에 메고 가기엔 너무 무거운

 

몸은 형틀에 끌려 가고

형틀은 몸에 끌려 가고

땅 모두 하늘 모두 친친 매달린

 

죄악 모두 죽음 모두

거기 매달린

나무 형틀 그 무게를 누가 알까

 

모두는 끝나고

패배의 마지막

 

태양 깨지고 산 웅웅 무너지고

강물들 역류하고

낮별의 우박 오고

뒤뚱대는 지축

피 흐르는 암반

 

마리아

그리고 막달레나 울음

 

모두는 돌아가고

적막

그때

당신의 그 울음소리를 누가 알까

 

포옹무한(抱擁無限), 범조사, 1981

 

 


 

박두진[朴斗鎭, 1916.3.10 ~ 1998.9.16] 시인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誌를 통해 등단.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3인 합동시집 『靑鹿集(청록집)』(을유문화사, 1946)을 간행한 뒤 첫 개인시집 『해』를 출간. 이후 『오도』, 『거미와 성좌』, 『인간밀림』, 『고산식물』, 『사도행전』, 『수석열전』, 『속 수석열전』, 『야생대』, 『포옹무한』, 『빙벽을 깬다』 등의 시집과 시론집 『시와 사랑』, 『한국현대시론』 등을 간행. 3.1문화상 예술상, 인촌상, 지용문학상, 외솔문학상, 동북아기독문학상 등을 수상. 연세대에서 정년퇴임 후 단국대와 추계예대에서 후학 양성. 1998년에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