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수 시인 / 심야(深夜)
보름달이 구름을 뚫고 솟으면……
가므스레한 어둠에 잠겼던 마을이 몸을 뒤척이며 흘러 흐른다.
하아얀 박꽃이 덮인 초가집 굴뚝에 연기 밤하늘을 보오야니 오르고, 뜰 안에 얼른얼른 사람이 흥성거린다.
어린애 첫 울음이 고즈넉한 마을을 깨울 때 바로 뒷방성 개 짖는 소리 요란요란하다.
새악시를 못 가진 나는 휘파람 불며 논두렁을 넘어 버렸단다.
초롱불, 삼문사, 1940
박남수 시인 / 아침 이미지 1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며, 어둠은 온갖 물상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의 잔치에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을 한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아침 이미지 2
1
아침 공간에 얼얼히 울리는 지난 여름의 우뢰 소리가 들린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어둔 길목에 수레바퀴가 삐걱이고, 멀리 가등(街燈)은 안개에 뜬 작은 섬.
2
기동(起動)하는 도시는 든든한 두 다리를 벌리고 거인처럼 서 있다. 저잣거리에 모여드는 장사치들은 버얼건 눈을 부비며 전대(錢帶)를 끌러 무딘 은전(銀錢)의 은빛을 되질한다.
3
이윽고 멀리 라디오는 첫 뉴우스를 알린다. 예멘에는 다시 쿠데타가 있었고 한국에는 또 물가가 오릅니다. 어제 같은 오늘이 몸을 흔들어 조금 더 거센 파동이 인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아침 이미지 3
샐 녘의 장판에는 북대기는 공급자들의 싸움이 도시의 한자락을 벗긴다. 자알 익은 과일들이 좌판에 적막처럼 앉아 있고 도마에서 허리가 끊기어 좌우로 달아나는 꼬리와 머리. 연방 선하품을 하는 아낙들의 옆구리에 낀 바구니에는 하나씩 아침의 행복이 담기고 이른 녘의 기동(起動)이 진폭을 넓히는 아침 놀이 거리에도 선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
1
어느 날, 나는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당신의 눈에 낀 안개 같은 것, 새가 죽어, 눈에 끼던 산안개의 흰빛이 나의 어두운 거울에 히뜩 지나가는 그 순간에, 나는 어딘지 분명찮은 숲 속을 날고 있었다. 겨울 마른 나뭇가지가 어른거린다. 땅 위에는 흰 눈이 깔리고 다섯 가락의 굳은 발자욱이 꽃잎처럼 패인, 긴 긴 일직선을 굽어보면서, 나는 끼룩끼룩 가슴의 소리를 뽑아 보았지만, 그것은 발톱이 판 상흔이 되어 나의 내벽(內壁)으로 되돌아오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2
어딘지 분명찮은 숲의 기억이, 지금 나의 겨드랑이에서 날개를 돋게 하지만, 나에게는 하늘이 없다. 이 큰 날개를 날릴 하늘이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땅 위를 기는 요트처럼,
당신의 원야(原野)에 선 한 그루 나무의 둘레를 맴돌며 어딘지 분명찮은 숲의 기억을 일심(一心)으로 뒤적이고 있지만, 그것은 유사 이전의 하늘에서 굽어본 한 폭의 검은 숲, 아니면 나의 가슴 깊이에 되새겨지는 마드레느기(紀)의 기억, 아니면……
3
사람은 모두 원생(原生)의 새. 어느 기억의 숲을 날며, 가지 무성한 잎 그늘에 잠깐씩 쉬어 가는 원생(原生)의 새. 지평과 하늘이 맞닿는 곳에서, 새는 땅으로 꺼져 들든가, 하늘로 증발되어 그 형상을 잃는다.
당신의 눈에 낀 안개 같은 것, 산새가 죽어, 눈에 끼던 흰 안개 같은 것, ―커어피를 마시며 아침 두 시, 분명 어딘지 모를 어느 숲의 기억에서 당신은 날아왔다. 나의 내벽(內壁)에 메아리가 되어.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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