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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남수 시인 / 심야(深夜)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8.

박남수 시인 / 심야(深夜)

 

 

보름달이 구름을 뚫고 솟으면……

 

가므스레한 어둠에 잠겼던 마을이 몸을 뒤척이며 흘러 흐른다.

 

하아얀 박꽃이 덮인 초가집 굴뚝에 연기 밤하늘을 보오야니 오르고,

뜰 안에 얼른얼른 사람이 흥성거린다.

 

어린애 첫 울음이 고즈넉한 마을을 깨울 때

바로 뒷방성 개 짖는 소리 요란요란하다.

 

새악시를 못 가진 나는 휘파람 불며 논두렁을 넘어 버렸단다.

 

초롱불, 삼문사, 1940

 

 


 

 

박남수 시인 / 아침 이미지 1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며,

어둠은 온갖 물상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의 잔치에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을 한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아침 이미지 2

 

 

1

 

아침 공간에

얼얼히 울리는 지난 여름의

우뢰 소리가 들린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어둔 길목에

수레바퀴가 삐걱이고,

멀리 가등(街燈)은 안개에 뜬 작은 섬.

 

2

 

기동(起動)하는 도시는 든든한 두 다리를 벌리고

거인처럼 서 있다.

저잣거리에 모여드는 장사치들은

버얼건 눈을 부비며

전대(錢帶)를 끌러 무딘 은전(銀錢)의 은빛을 되질한다.

 

3

 

이윽고 멀리 라디오는

첫 뉴우스를 알린다.

예멘에는 다시 쿠데타가 있었고

한국에는 또 물가가 오릅니다.

어제 같은 오늘이 몸을 흔들어

조금 더 거센 파동이 인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아침 이미지 3

 

 

샐 녘의 장판에는

북대기는 공급자들의 싸움이

도시의 한자락을 벗긴다.

자알 익은 과일들이

좌판에 적막처럼 앉아 있고

도마에서 허리가 끊기어

좌우로 달아나는 꼬리와 머리.

연방 선하품을 하는

아낙들의 옆구리에 낀 바구니에는

하나씩 아침의 행복이 담기고

이른 녘의 기동(起動)이 진폭을 넓히는

아침 놀이 거리에도 선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

 

 

1

 

어느 날, 나는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당신의 눈에 낀 안개 같은 것,

새가 죽어, 눈에 끼던 산안개의 흰빛이

나의 어두운 거울에 히뜩 지나가는 그 순간에, 나는

어딘지 분명찮은 숲 속을 날고 있었다.

겨울 마른 나뭇가지가 어른거린다.

땅 위에는 흰 눈이 깔리고

다섯 가락의 굳은 발자욱이 꽃잎처럼 패인,

긴 긴 일직선을 굽어보면서, 나는

끼룩끼룩 가슴의 소리를 뽑아 보았지만,

그것은 발톱이 판 상흔이 되어

나의 내벽(內壁)으로 되돌아오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2

 

어딘지 분명찮은 숲의 기억이, 지금

나의 겨드랑이에서 날개를 돋게 하지만,

나에게는 하늘이 없다. 이 큰 날개를 날릴 하늘이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땅 위를 기는 요트처럼,

 

당신의 원야(原野)에 선

한 그루 나무의 둘레를 맴돌며

어딘지 분명찮은 숲의 기억을

일심(一心)으로 뒤적이고 있지만,

그것은 유사 이전의 하늘에서 굽어본 한 폭의 검은 숲,

아니면 나의 가슴 깊이에 되새겨지는 마드레느기(紀)의 기억,

아니면……

 

3

 

사람은 모두 원생(原生)의 새.

어느 기억의 숲을 날며, 가지 무성한 잎 그늘에

잠깐씩 쉬어 가는 원생(原生)의 새.

지평과 하늘이 맞닿는 곳에서, 새는

땅으로 꺼져 들든가, 하늘로 증발되어 그 형상을 잃는다.

 

당신의 눈에 낀 안개 같은 것,

산새가 죽어, 눈에 끼던 흰 안개 같은 것,

―커어피를 마시며

아침 두 시, 분명 어딘지 모를 어느 숲의 기억에서

당신은 날아왔다. 나의 내벽(內壁)에 메아리가 되어.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朴南秀) 시인(1918.5.3-1994.9.17)

평양 출생. 숭실상고를 거쳐 1941년 일본 주오(中央)대학을 졸업. 초기에는 자연적 서경과 서정 속에서 절박한 감정을 은유적으로 환기하는 시를 썼으며, 후기에는 존재성을 규명하려는 주지적 경향을 가졌다.  유학 시절 제1회 <문장>지의 추천을 받은 김종한, 이용악 등과 사귀게 되면서, 그들의 권유로 <문장>지에 투고하였는데,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정지용에게 추천됨.  1940년에 첫 시집인 <초롱불>을 낸 이후 "갈매기 소묘" "새의 암장(暗葬)" 등 정갈하면서도 의식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시를 써 왔다. 미국에서 지낸 이국 생활의 외로움을 그린 <그리고 그 이후>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함. 1957년에는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장만영 등과 함께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했으며, 아시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1994년 6월에는 조국 통일에의 절실한 심경을 노래한 시 "꿈의 물감"으로 서울신문사가 제정한 공초(空超)문학상 (제2

회)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