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시인 / 달아
달아! 하늘 가득히 서리운 안개 속에 꿈 모닥이같이 떠도는 달아 나는 혼자 고요한 오늘 밤을 들창에 기대어 처음으로 안 잊히는 그이만 생각는다.
달아! 너의 얼굴이 그이와 같네 언제 보아도 웃던 그이와 같네 착해도 보이는 달아 만져 보고저운 달아 잘도 자는 풀과 나무가 예사롭지 않네
달아! 나도 나도 문틈으로 너를 보고 그이 가깝게 있는 듯이 야릇한 이 마음 안은 이대로 다른 꿈은 꾸지도 말고 단잠에 들고 싶다.
달아! 너는 나를 보네 밤마다 손치는 그이 눈으로― 달아 달아 즐거운 이 가슴이 아프기 전에 잠재워 다오―내가 내가 자야겠네.
신여성, 1926. 6
이상화 시인 / 대구 행진곡
앞으로는 비슬산 뒤로는 팔공산 그 복판을 흘러가는 금호강 물아 쓴 눈물 긴 한숨이 얼마나 쎄기에 밤에는 밤 낮에는 낮 이리도 우나
반남아 무너진 달구성 옛터에나 숲그늘 우거진 도수원 놀이터에 오고가는 사람이 많기야 하여도 방천둑 고목처럼 여윈 이 얼마랴
넓다는 대구 감영 아무리 좋대도 웃음도 소망도 빼앗긴 우리로야 님조차 못 가진 외로운 몸으로야 앞뒤뜰 다 헤매도 가슴이 답답타
가을밤 별같이 어여쁜 이 있거든 착하고 귀여운 술이나 부어 다고 숨가쁜 이 한밤은 잠자도 말고서 달 지고 해 돋도록 취해나 볼 테다.
별건곤, 1930. 10
이상화 시인 / 독백
나는 살련다 나는 살련다 바른 맘으로 살지 못하면 미쳐서도 살고 말련다 남의 입에서 세상의 입에서 사람 영혼의 목숨까지 끊으려는 비웃음의 쌀이 내 송장의 불쌍스런 그 꼴 위로 소낙비같이 내려 쏟을지라도― 짓퍼부울지라도 나는 살련다 내 뜻대로 살련다 그래도 살 수 없다면― 나는 제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 벙어리의 붉은 울음 속에서라도 살고는 말련다 원한이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장마진 냇물의 여울 속에 빠져서 나는 살련다 게서 팔과 다리를 허둥거리고 부끄럼 없이 몸살을 쳐보다 죽으면―죽으면―죽어서라도 살고는 말련다
동아일보, 1923. 10. 26
이상화 시인 / 동경에서
오늘이 다 되도록 일본의 서울을 헤매어도 나의 꿈은 문둥이살 같은 조선의 땅을 밟고 돈다.
예쁜 인형들이 노는 이 도회의 호사로운 거리에서 나는 안 잊히는 조선의 하늘이 그리워 애닯은 마음에 노래만 부르노라.
`동경'의 밤이 밝기는 낮이다―그러나 내게 무엇이랴! 나의 기억은 자연이 준 등불 해금강의 달을 새로이 솟친다.
색채와 음향이 생활의 화려로운 아롱사(紗)를 짜는― 예쁜 일본의 서울에서도 나는 암멸(暗滅)을 서럽게―달게 꿈꾸노라.
아 진흙과 짚풀로 얽맨 움 밑에서 부처같이 벙어리로 사는 신령아 우리의 앞엔 가느나마 한 가닥 길이 뵈느냐―없느냐―어둠뿐이냐?
거룩한 단순의 상징체인 흰옷 그 너머 사는 맑은 네 맘에 숯불에 손 데인 어린 아기의 쓰라림이 숨은 줄을 뉘라서 아랴!
벽옥의 하늘은 오직 네게서만 볼 은총 받았던 조선의 하늘아 눈물도 땅 속에 묻고 한숨의 구름만이 흐르는 네 얼굴이 보고 싶다. 아 예쁘게 잘 사는 `동경'의 밝은 웃음 속을 온 데로 헤매나 내 눈은 어둠 속에서 별과 함께 우는 흐린 초롱불을 넋없이 볼 뿐이다.
문예운동, 192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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