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시인 / 이상한 나라의 꿈
펑펑 함박눈은 눈으로 얼음 얼어 하얗게 얼어붙고 꽃은 꽃으로 빨갛게 얼음 얼어 꽃으로 얼어붙고 풀은 풀 나무는 나무 숲은 숲으로 얼음 얼어 푸르게 얼어붙고 바다는 바다로 파랗게 물고기는 물고기로 펄덕펄덕 비늘 싱싱한 채 하늘을 날으는 새들은 새들의 날갯짓 새들의 날으는 꼴로 날으면서 얼어붙고
밤은 밤으로 펑펑 까맣게 낮은 낮으로 눈부시게 햇살 밝게 새벽은 새벽 노을은 노을로 빠알갛게 얼음 얼어 얼어붙고 안개는 안개로 자욱하게 소낙비는 소낙비 천둥은 천둥으로 번개는 번개 무지개는 무지개로 얼음 얼어 얼어붙고 구름은 구름으로 멀디 먼 성좌는 성좌로 은하는 은하로 얼음 얼어 얼어붙고
언어는 언어 마음은 마음 꿈은 꿈으로 하얗게 얼어붙고 역사와 문명 사랑과 미움 향락과 탐욕 횡포와 억압 불안과 공포 분노와 항거 인종과 체념 전쟁과 살육 절망과 허무 행복과 불행 눈물과 탄식 기다림과 희망도 얼음 얼어 얼어붙고 평화와 자유 독재와 폭력도 얼음 얼어 얼어붙고 음악과 춤 포옹과 입맞춤도 얼음 얼어 얼어붙고
지구 덩어리 달덩어리 억억만 별과 별 우주 천체 일체 있음 무한 영원 그 영원도 얼음 얼어 얼어붙고 햇덩어리 벌겋게 활활 타는 햇덩어리 얼음 속에 빨갛게 얼어붙고 그때 어쩌면 하느님 하느님 어이 어이 높게 높게 홀로 울으시고 울으시고.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4
박두진 시인 / 자화상(自畵像)
돌과 돌들이 굴러가다가 나를 두들기고, 모래와 모래가 쓸려가다가 나를 두들기고, 물결과 물결이 굽이쳐 가다가 나를 두들기고,
너무도 기나긴 억겁의 세월,
햇살과 햇살이 나를 두들기고, 달빛이 나를 두들기고, 깜깜한 밤들이 나를 두들기고, 별빛과 별빛이 나를 두들기고,
아, 훌훌한 낙화가 꽃잎이 나를 두들기고, 바람이 나를 두들기고, 가랑비 소낙비 진눈깨비가 나를 두들기고, 싸락눈 함박눈 눈보라가 나를 두들기고, 우박이 나를 두들기고,
그, 분노가 나를 두들기고, 회의와 불안, 고독이 나를 두들기고, 절망이 나를 두들기고,
아니, 사랑이 나를 두들기고, 끝없는 뉘우침 끝없는 기다림 갈망이 나를 두들기고,
양심과 정의, 지성이 나를 두들기고, 진리와 평화 자유가 나를 두들기고, 겨레가 나를 두들기고,
끝없는 아름다움 예술이 나를 두들기고,
나사렛 예수 주 그리스도와 하느님, 말씀이 나를 두들기고.
속 수석열전(續水石列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잔내비
잔내비 칼 휘두른다. 꽃밭이고 소년이고 양의 떼고 없다. 피 보면 미친다는 이리 넋에 취하여 어쩌나 둘러 서서 침묵하며 지켜보는 대낮 여기 잔내비떼 칼 휘두른다. 심장을 마구 찔러 목숨 다치고 은 장식 조상이 내린 거울 깨뜨리고 꽃밭 함부로 낭자하게 개발 짓밟어 남녘에서 들뜬 바람 독 어린 발정 죽을 줄 제 모르고 칼 휘두른다.
해, 청만사, 1949
박두진 시인 / 전설(傳說)
서리 서리 능구리가 감아 오르는데 잔허리를 능구리가 감아 오르는데 가슴과 모가지와 모가지와 코밑 혓바닥이 코밑으로 늴름거려 오르는데 종소리는 아직도 울지 않는데 까투리야 까투리야 나는 그 새파란 비수(匕首)라도 한 자루 있어야겠다. 손아금에 비수(匕首) 하나 쥐어야겠다.
인간밀림(人間密林), 일조각, 1963
박두진 시인 / 절벽가(絶壁歌)
절벽이 아니라 무너져 내리는 별들이네. 별들이 아니라 서서 우는 절벽들이네.
별들이 별들 위에 절벽이 절벽 위에 있네.
절벽이 절벽 아래에도 있네. 절벽이 절벽 앞에, 절벽 뒤에, 절벽이 절벽 안에도 있네
절벽은 절벽끼리 손을 서로 닿지 않네. 절벽은 절벽끼리 말을 서로 할 수 없네.
절벽이 절벽끼리 눈을 서로 가리우네. 절벽이 절벽끼리 귀를 서로 가리우네. 절벽이 절벽끼리 입을 서로 막네.
절벽들의 햇불을 절벽들이 못 보네. 절벽들의 절규를 절벽들이 못 듣네.
절벽은 스스로 사랑의 뜨거움을 말하지 않네. 절벽은 그 외로움 절벽은 그 분노 절벽은 그 내일에의 절망을 말하지 않네.
절벽의 가슴속엔 쏟아지는 별의 사태, 절벽들의 가슴속엔 피와 꿈의 비바람, 절벽들의 가슴속엔 펄펄 꽃이 지네.
어디에나 홀로 서서 절벽들이 우네.
야생대(野生代), 일조각,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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