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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상화 시인 / 마음의 꽃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29.

이상화 시인 / 마음의 꽃

― 청춘에 상뇌(傷惱)되신 동무를 위하여

 

 

오늘을 넘어선 가리지 말라!

슬픔이든, 기쁨이든, 무엇이든,

오는 때를 보려는 미리의 근심도―.

 

아, 침묵을 품은 사람아, 목을 열어라,

우리는 아무래도 가고는 말 나그넬러라,

젊음의 어둔 온천에 입을 적셔라.

 

춤추어라, 오늘만의 젖가슴에서,

사람아, 앞뒤로 헤매지 말고

짓태워 버려라!

끄슬려 버려라!

오늘의 생명은 오늘의 끝까지만―

 

아, 밤이 어두워 오도다,

사람은 헛것일러라,

때는 지나가다,

울음의 먼 길 가는 모르는 사이로―

 

우리는 가슴 복판에 숨어 사는

옅푸른 마음의 꽃아 피워 버리라,

우리는 오늘을 지리며 먼 길 가는 나그넬러라.

 

백조, 1923. 9

 

 


 

 

이상화 시인 / 몽환병

 

 

목적도 없는 동경에서 명정(酩酊)하던 하루이었다.

어느 날 한낮에 나는 나의 `에덴'이라는 솔숲 속에

그날도 고요히 생각에 까무러지면서 누워 있었다.

잠도 아니요 죽음도 아닌 침울이 쏟아지며 그 뒤를 이어선 신비로운 변화가 나의 심령 우으로 덮쳐 왔다.

 

나의 생각은 넓은 벌판에서 깊은 구렁으로―다시 아침 광명이 춤추는 절정으로―또다시 끝도 없는 검은 바다에서 낯선 산 피안으로―구름과 저녁놀이 흐느끼는 그 피안에서 두려움 없는 주저에 나른하여 눈을 감고 주저앉았다.

오래지 않아 내 마음의 길바닥 위로 어떤 검은 안개 같은 요정이 소리도 없이 방만한 보조로 무엇을 찾는 듯이 돌아다녔다. 그는 모두 검은 의상을 입었는가―한 억촉(憶觸)이 나기도 하였다. 그때 나의 몸은 갑자기 열병든 이의 숨결을 지었다. 온몸에 있던 맥박이 한꺼번에 몰려 가슴을 부술 듯이 뛰놀았다.

 

그리하자 보고저워 번갯불같이 일어나는 생각으로 두 눈을―부비면서 그를 보려 하였으나 아―그는 누군지―무엇인지―형적조차 언제 있었더냐 하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애닯게도 사라져 버렸다.

 

다만 나의 기억에는 얼굴에까지 흑색 면사를 쓴 것과 그 면사 너머에서 햇살 쪼인 석탄과 같은 눈알 두 개의 깜작이던 것뿐이었다.

아무리 보고자 하여도 구름 덮인 겨울과 같은 유장이 안계(眼界)로 전개될 뿐이었다. 발자욱 소리나 옷자락 소리조차 남기지 않았다.

 

갈피도―까닭도 못 잡을 그리움이 내 몸 안과 밖 어느 모퉁이에서나 그칠 줄 모르는 눈물과 같이 흘러내렸다―흘러내렸다.

숨가쁜 그리움이었다―못 참을 것이었다.

 

아! 요정은 전설과 같이 갑자기 현현하였다. 그는 하얀 의상을 입었다. 그는 우상과 같이 방그레 웃을 뿐이었다. 뽀얀 얼굴에―새까만 눈으로 연붉은 입술로―소리도 없이 웃을 뿐이었다. 나는 청맹과니모양으로 바라보았다―들여다보았다.

 

오! 그 얼굴이었다―그의 얼굴이었다―잊혀지지않는 그의 얼굴이었다. 내가 항상 만들어보던 것이었다.

 

목이 메이고 청이 잠겨서 가슴 속에 끓는 마음이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고 불김 같은 숨결이 켜질 뿐이었다. 손도 들리지 않고 발도 떨어지지 않고 가슴 위에 쌓인 바윗돌을 떼밀려고 애쓸 뿐이었다.

 

그는 검은 머리를 홑을고 한 걸음―한 걸음―걸어왔다. 나는 놀라운 생각으로 자세히 보았다. 그의 발이 나를 향하고 그의 눈이 나를 부르고 한 자욱 한 자욱 내게로 와 섰다. 무엇을 말할 듯한 입술로 내게로―내게로 오던 것이다―나는 눈이야 찢어져라고 크게만 떠 보았다. 눈초리도 이빨도 똑똑히 보였다.

 

그러나 갑자기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입을 다물고 나를 보았다―들여다보았다. 아 그 눈이 다른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 눈을 뚫을 듯한 무서운 눈이었다. 아 그 눈에서―빗발 같은 눈물이 흘렀다. 까닭 모를 눈물이었다. 답답한 설움이었다.

 

여름 새벽 잔디풀 잎사귀에 맺혀서 떨어지는 이슬과 같이 그의 검고도 가는 속눈썹마다에 수은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이 달려 있었다.

아깝고 애처로운 그 눈물은 그의 두 볼―그의 손등에서 반짝이며 다시 고운 때 묻은 모시치마를 적시었다. 아! 입을 벌리고 받아 먹고 저운 귀여운 눈물이었다. 뼈속에 감추어 두고저운 보배로운 눈물이었다.

 

그는 어깨를 한두 번 비슥하다가 나를 등지고 돌아섰다. 홑은 머리숱이 온통을 덮은 듯하였다. 나는 능수버들 같은 그 머리카락을 안으려 하였다―하다못해 어루만져라도 보고저웠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두 걸음 저리로 갔다. 어쩔 줄 모르는 설움만을 나의 가슴에 남겨다 두고 한 번이나마 돌아볼 바도 없이 찬찬히 가고만 있었다 .잡을래야 잡을 수 없이 가다간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눈알이 빠진 듯한 어둠뿐이었다. 행여나 하는 맘으로 두 발을 꼬으고 기다렸었다. 하나 그것은 헛일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는 가고 오지 않았다.

 

나의 생각엔 곤비한 밤의 단꿈 뒤와 같은 추고(追考)―가상의 영감이 떠돌 뿐이었다. 보담 더 야릇한 것은 그 요정이 나오던 그때부터는―사라진 뒤 오래도록 마음이 미온수에 잠긴 어름 조각처럼 부유가 되며 해이(解弛)가 되나 그래도 무정방(無定方)으로 욕념(慾念)에도 없는 무엇을 찾는 듯하였다.

 

그때 눈과 마음의 `렌즈'에 영화된 것은 다만 장님의 머리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혼란뿐이요 영혼과 입술에는 훈향에 비친 나비의 넋 빠진 침묵이 흐를 따름이었다. 그밖엔 오직 망각이 이제야 뗀 입 속에서 자체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기억으로 거닐을 뿐이었다.

 

나는 저물어가는 하늘에 조으는 별을 보고 눈물 젖은 소리로

`날은 저물고

밤이 오도다

흐릿한 꿈만 안고

나는 살도다'고 하였다.

아! 한낮에 눈을 뜨고도 이렇던 것은 나의 병인가 청춘의 병인가? 하늘이 부끄러운 듯이 새빨개지고 바람이 이상스러운지 속삭일 뿐이다.

 

조선문단, 1926. 10

 

 


 

 

이상화 시인 / 무제

 

 

오늘 이 길을 밟기까지는

아 그때가 가장 괴롭도다

아직도 남은 애닯음이 있으려니

그를 생각는 오늘이 쓰리고 아프다.

 

헛웃음 속에 세상이 잊어지고

끄을리는 데 사람이 산다면

검아 나의 신령을 돌멩이로 만들어 다고

제 사리의 길은 제 찾으려는 그를 죽여 다고

 

참 웃음의 나라를 못 밟을 나이라면

차라리 속 모르는 죽음에 빠지련다.

아 멍들고 이울어진 이 몸은 묻고

쓰린 이 아픔만 품 깊이 안고 죽으련다.

 

상화와 고월, 미발표, 1951

 

 


 

 

이상화 시인 / 바다의 노래

― 나의 넋, 물결과 어우러져 동해의 마음을 가져온 노래

 

 

내게로 오너라 사람아 내게로 오너라

병든 어린애의 헛소리와 같은

묵은 철리(哲理)와 낡은 성교(聖敎)는 다 잊어버리고

애통을 안은 채 내게로만 오너라.

 

하느님을 비웃을 자유가 여기 있고

늙어지지 않는 청춘도 여기 있다

눈물 젖은 세상을 버리고 웃는 내게로 와서

아 생명이 변동에만 있음을 깨쳐 보아라.

 

월간 『開闢(개벽)』  1925. 3

 

 


 

이상화 [李相和, 1901.4.5~1943.4.25] 시인

1901년 대구(大邱)에서  출생.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 경성 중앙학교에서  수학. 1921년 『백조』 동인으로 참가하여 「單調」, 「가을의 風景」, 「末世의 欷嘆」을 발표하며 등단. 일본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 및 프랑스문학을 공부하고  1924년  귀국. 《개벽》誌를 중심으로 시·소설·평론 등을  발표하고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에 가담.  《개벽》, 《문예운동》, 《여명》, 《신여성》, 《삼천리》, 《별건곤》, 《조선문단》, 《조선지광》 등의 동인. 시인이며 작가, 독립운동가, 문학평론가, 번역문학가, 교육자, 권투 선수로도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