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수 시인 / 여름에는 보이지 않던
여름에는 보이지 않던 그 영혼(靈魂)까지도 얼비춰 보이는 투명한 한국의 가을은, 지금 누더기진 옷을 벗고 그 밋밋한 육신(肉身)을 세우고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장식(裝飾)으로 건강한 육신을 가리워 왔나 보다. 손가락에서 뿜어오르는 보석(寶石)의 빛으로 우리 여인(女人)들은 그 아름다움을 이즈러뜨려 왔나 보다.
지금 한국의 가을은 모든 것을 벗어 버린 청자(靑磁)의 살갗. 그 영혼(靈魂)까지도 얼비춰 보이는 투명한 한국의 가을은, 지금 그 밋밋한 육신(肉身)을 세우고 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열매
열매는 꽃나무가 세우는 마지막 고독이지만 죽어서 오히려 뿜어 올리는 이미지의 첫 분수다. 어느 한 톨의 연(蓮)밥은 이천 년의 굳은 고독을 깨고 신라 적 혹은 고구려 적 그 늙은 아버지의 고명딸로, 지금 꽃을 벌린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열쇠
유폐된 것에는 해방을. 자유로운 것에는 구속을. ―그러기 위해서 멋도 없이 길다란 쇠붙이는 있다. 내 포켓에서 내 손가락의 애무를 받으면서 그것은 늘 차갑다. 한 장의 여닫이의 이편과 저편에서, 세상을 달리하는 이 신비를 그것은 쥐고 있다. 때로는 귀중한 것이 모셔지는 장소지만, 때로는 귀하신 분들도 들어가시는 장소. ―그러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열린 것은 닫히고 닫힌 것은 열리고.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박남수 시인 / 오랜 기도(祈禱)
내가 어둠으로 띄운 새들은 하늘에 암장되었는가. 어머니를 향해 이십 년의 세월을 기도로 띄운 새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내 나이가, 지금 헤어질 때의 어머니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 생사조차 모른다. 하늘이여, 이 불륜의 세월을 끊고 아들은 어머니의 무릎에 지아비는 지어미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라. 저들이 함께 웃고 저들이 함께 울도록, 하늘이여 무수한 사람이 띄운 새들이 이제는 귀소(歸巢)하도록 빛을 밝히라.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유전(流轉)
온천(溫泉)이 솟아난 날……
말 궁둥이에 송아지 찰찰 감아 들고 황소 모가지에 놋방울이 왈랑이던 벌에,
앓는 이와 창부(娼婦)의 마을이 들어앉았다.
이윽고 어느 날, 풀섶 헤이며 걸어 나온 멧도야지는
낯설은 마을을 버려두고 어디로 가 버렸다.
온천(溫泉)은 솟아 솟아 오르기만 할 것일까……
초롱불, 삼문사, 1940
박남수 시인 / 임종(臨終)
죽음은 돌려 놓은 병풍의 산수(山水)를 혼자 보고 있을까. 이승 쪽에는 향을 태우며 곡 소리가 들리지만, 산수(山水)의 쪽에는 소리가 없는 무(無)의 찬바람만이 유한(有限)한 것을 흔들고 있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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