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시인 / 완벽(完璧)한 산장(山莊)
어디로 해서 너의 문을 들어갈까. 어떻게 어디로 해서 너의 내부 너의 가장 안의 너의 너 너의 너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네가 정말로 드러내는 너의 사상 네가 정말로 소리내는 너의 음악 네가 정말로 하고 싶은 너의 말을 들어볼 수 있을까. 밖으로부터도 너의 안은 빛으로 비쳐서 밝힐 수 없고 안으로부터도 너의 빛은 밖으로 비쳐서 밝히지 않는 다만 푸르디 푸르게 견고한 지붕 푸르디 푸르게 견고한 기둥 푸르디 푸르게 밀폐된 벽 푸르디 푸프게 충전된 안 그러한 둘레로 견고히 차 있을 뿐 싱싱한 황금의 햇살도 조용히 몸으로 칠칠한 밤의 어둠도 조용히 조용히 몸으로 빨아들여 낮과 밤 사시장철 영원 혼자 있어 말하지 않고 듣지 않고 보지도 않고 있어 슬프지도 노하지도 기쁘지도 않고 있어 바람에도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랑에도 독주에도 취하지 않는다. 천의 만의 억의 부피 천의 만의 억의 깊이 천의 만의 사색의 억의 갈필 지닌 너 의연하고 자약한 안의 푸른 무게 너의 너의 가장 안에 열 개의 뜨거운 태양을 열 개의 출렁대는 바다를 열 개의 태풍을 열 개의 개벽 천지 천지 개벽을 지니고도 무한 무한 침묵 속에 억만 명의 함성을 무한 무한 침묵 속에 억만 명의 깃발을 억만 명의 금나팔과 억만 명의 합창 그 황홀한 천지를 지니고도 지금은 다만 잠잠한 너, 나의 앞의 너의 너여 있으리로다.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우리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그 붉은 선혈(鮮血)로 나부끼는 우리들의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절규(絶叫)를 멈춘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 피불로 외쳐 뿜는 우리들의 피외침을 멈출 수가 없다.
불길이여! 우리들의 대열(隊列)이여! 그 피에 젖은 주검을 밟고 넘은 불의 노도(怒濤), 불의 태풍(颱風), 혁명(革命)에의 전진(前進)이여! 우리들 아직도 스스로는 못 막는 우리들의 피 대열(隊列)을 흩을 수가 없다. 혁명(革命)에의 전진(前進)은 멈출 수가 없다.
민족(民族), 내가 사는 조국(祖國)이여. 우리들의 젊음들. 블이여! 피여! 그 오오래 우리에게 썩어 내린 악(惡)으로 불순(不純)으로 죄악(罪惡)으로 숨어 내린 그 면면(綿綿)한 우리들의 핏줄 속의 썩은 것을 씻쳐 내는, 그 면면(綿綿)한 우리들의 핏줄 속에 맑은 것을 솟쳐 내는, 아, 피를 피로 씻고, 불을 불로 살워, 젊음이여! 정(淨)한 피여! 새 세대(世代)여!
너희들 이미 일어선 게 아니냐? 분노(憤怒)한 게 아니냐? 내달린 게 아니냐? 절규(絶叫)한 게 아니냐? 피흘린 게 아니냐? 죽어간 게 아니냐?
아, 그 뿌리어진 임리한 붉은 피는 곱디 고운 피꽃잎, 피꽃은 강(江)을 이뤄, 강(江)물이 갈앉으면 하늘 푸르름. 혼령(魂靈)들은 강산(江山) 위에 햇볕살로 따스워,
아름다운 강산에 아름다운 나라를, 아름다운 나라에 아름다운 겨레를, 아름다운 겨레에 아름다운 삶을 위해, 우리들이 이루려는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 절대공화국(絶對共和國).
철저한 민주 정체(民主政體). 철저한 사상(思想)의 자유(自由), 철저한 경제 균등(經濟均等), 철저한 인권 평등(人權平等)의,
우리들의 목표는 조국(祖國)의 승리(勝利), 우리들의 목표는 지상(地上)에서의 승리(勝利), 우리들의 목표는 정의(正義), 인도(人道), 자유(自由), 평등(平等), 인간애(人間愛)의 승리(勝利)인, 인민(人民)들의 승리(勝利)인, 우리들의 혁명(革命)을 전취(戰取)할 때까지,
우리는 아직 우리들의 피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들의 피 외침을 멈출 수가 없다. 우리들의 피 불길, 우리들의 전진(前進)을 멈출 수가 없다.
혁명(革命)이여 !
거미와 성좌(星座), 대한기독교서회, 1962
박두진 시인 / 웅(熊)
내가 죽으리라. 너희들이 내 몸뚱일 터뜨렸구나. 내가 죽으리라.
가죽이 필요하냐? 내가 죽으리라. 발바닥이 필요하냐? 내가 죽으리라.
두고 온 어린 새끼 못 만나 본 짝이여. 살다가 온 골짜기여. 못 밟아 본 산줄기여.
칙칙한 나무숲 하늘 펀히 트이더니, 돌아가누나. 내 살점 경련하며 황토흙으로. 돌아가누나. 내 핏줄 굽이치며 뜨건 강으로.
내가 죽으리라. 언제까지 이대로 두 눈 뜨리라. 내가 죽으리라. 언제까지 이대로 심장 뛰리라.
인간밀림(人間密林), 일조각, 1963
박두진 시인 / 유방(乳房)
누구가 저기를 올라갈까
꿈으로 쌓아 올린 하늘 닿는 저 꼭지
터지면 샘물 솟을 융기의 저 내밀
누구가 저기를 올라갈까
손 씻고 발 씻고 넋을 마저 씻고서도
그대 아니 가슴 열면 기웃조차 할 수 없는
정해라 펄펄 오는 꽃의 사태 그 너머
희디 하얀 저 봉우리를 누구가 올라갈까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은하계, 태양계, 대우주천체 무한도 원제 : 은하계(銀河系), 태양계(太陽系), 대우주천체(大宇宙天體) 무한도(無限圖)
너는 돌이 아니고 별이다. 별이 아니고 꿈이다. 꿈이 아니고 불이다. 불이 아니고 분노다. 분노가 아니고 참음이다. 참음이 아니고 포용, 포용이 아니고 사랑이다. 사랑이 아니고 살, 살이 아니고 넋, 넋이 아니고 피의 응어리, 그리움의 응어리, 기다림, 외로움, 목숨과 목숨의 뼈, 뼈의 영원, 살의 영원, 꿈의 영원, 알맹이 그 억억 조조 미립자, 빛, 핵, 빛의 핵, 핵의 빛, 천지 우주의 무한 있음, 무한 있음의 내 앞에 있음, 만남, 초자연 속의 자연, 자연 속의 초자연, 있음의 그 영원 속의 눈이 부신 실존이다. 억만 개의 햇덩어리, 너의 안에 이글대고, 억억만 별의 나라 너의 속에 윙윙대는, 너 한 개 돌, 나도 한 개 돌, 돌과 돌이 끌어안고 엉이엉이 운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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