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수 시인 / 잔등의 시(詩)
하늘은 돌아누워 있는 것일까.
잔등을 이리로 향하고.
누구도 하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
나는 세상을 향해 잔등을 돌리고 누워 있다.
*
새가 늘 하늘의 잔등에 제 잔등을 부비며 하늘을 날아갈 때만 노래하듯이 나도 잔등의 뒤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리라.
새는 잔등을 하늘로 부비며 노래는 세상을 향하여 부르고 있었지, 그렇지, 나도 잔등 뒤켠에서 외로운 사람들을 향하여 잔등을 맞부비는 그런 노래를 만들어 불러야지.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박남수 시인 / 잘 익은 막걸리는
잘 익은 막걸리는 시골 계집아이의 머리카락 냄새가 난다. 그래서 밤이면 사내들은 주막으로 찾아가 막걸리를 퍼마시지만, 안아 볼 수도 없는 허무를 헷안고 허청거린다. 썰렁한 주안상을 물리고 씨부렁하니 자리를 뜨지만, 누구도 채울 수 없는 빈 가슴에 시골 계집아이를 출렁거리며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그래서 그대로 꿈으로 밀행(密行)하는 것일까.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적경(寂境)
산짜구니에 올라 다람쥐 벗삼아 가랑잎 긁어 모아 술병이 오골오골 끓어 나면,
늦은 가을에, 마음은 트인 하늘이였다.
서쪽 하늘 붉게 붉게 물들 무렵,
남은 술 낙엽(落葉)에 재벌 데우고 앉어
초롱불, 삼문사, 1940
박남수 시인 / 절규(絶叫)
새는 가지 끝에서 석양에 타고 있었다. 슬픈 안경을 두리번거리며 벗어날 수 없는 사위(四圍)의 사정거리를 느끼고 있었다. 숲을 한 번 힐끔 보고, 단념하듯 석양의 피를 뿜으며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놀은 하늘로 붉게 번져 오르기 시작하였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종달새
하늘의 병풍 뒤에 뻗은 가지, 가지 끝에서 포롱 포롱 포롱 튀는 천상(天上)의 악기들.
*
보리밭에 서렸던 아지랑이의 영신(靈身)들이, 지금은 하늘에서 얼굴만 내어밀고.
*
군종(群鍾)이 울리는 음악의 잔치가 되어 고운 갈매의 하늘을 포롱 포롱 포롱 날고 있다.
*
흐르고 있다. 포롱 포롱 포롱 시냇물 위에 날리는 잔바람에 하늘이 떨어져 파안(破顔)의 즐거운 파문.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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