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시인 / 젊은 죽음들에게
누가 알리. 선혈로 강을 이뤄 한 바퀴 친친히 지구를 띠 두른 그 넋들 서로 안고 오늘을 울어옘을.
별빛 그 눈동자들 지금은 하늘엘까? 낭랑한 그 목소리들 지금은 공중엘까? 푸른 그 애띤 넋들 지금은 햇살 속엘까? 바람 속엘까? 떨리는 풀잎 꽃이 지는 꽃나부낌 속엘까? 그 착한 얼굴 모습들 지금은 강물 속엘까? 거울로 어리우는 바위 속엘까? 나무 그늘엘까? 잔잔한 호수 속엘까? 그 물 속 거꾸로인 하늘 그림자엘까?
알아서는 무엇하리. 너희들 뜨건 피와 찢긴 살은 흙거름, 거름 위에 뿌리한, 나무와 풀잎들과 꽃망울과 꽃,
죽음들이 잠들은 죽음 위에 서서 피와 살로 기름진 흙을 밟고 서서 우리들 여전히 히히대며 사는 것을 짐승들도 인간들도 어금니를 갈아 피흘리며 죽여가며 흥성흥성 사는 것을.
그러리. 무엇엔가 그러나 너희들은 살았으리. 너희들 뿌려 흘린 그 뜨거운 붉은 피가 유유한 강이 되고, 그래서 푸르르고.
그 빛나는 눈동자들 찬란한 별이 되고, 그래서 총총하고. 그 찢기운 붉은 살들 툭툭한 흙이 되고, 그래서 기름지고 희디 하얀 백골 뼈가 녹아 샘이 되어, 그래서 샛말갛고. 너희들의 숫된 맘은 푸른 바람결, 이름 석 잔 바람결, 혼령들은 햇살이 되어 오늘 저 볕살 속에 살아 있으리.
우리들 스스로도 알아지지 못하는 풀포기, 물굽이, 바람결과 가지 끝에 꽃이팔, 모래톱, 양지와 그늘 속에 혼령 속 마음 속에 피 흐름에 있으리. 살음 속에 영원히 잔잔하게 있으리.
거미와 성좌(星座), 대한기독교서회, 1962
박두진 시인 / 젊음의 바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바다다 밀어라 땅에서 쏟아지는 바다다 밀어라 바다에서 쏟아지는 바다다 밀어라
무너지는 우리의 사랑을 무너지는 우리들의 나라를 무너지는 우리들의 세기를 삼키고도
너는 어제같이 일렁이고 퍼렇게 입을 벌려 삼키는 아침의 저 햇덩어리 퍼렇게 입을 벌려 삼키는 저 달덩어리 달덩어리
언제난 모두요 하나로 착한 자나 악한 자 우리들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꿈도 자랑도 슬픔도 파도 덮쳐 너의 품에 용해하는
다만 끝없이 일렁이는 끝없이 정열하는 무한 넓이 무한 용량 푸르디 푸른 너 천길 속의 의지 천길 속의 고요로다.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천도설(天桃說)
맨발로 네가 올라간다. 맨발로 네가 올라가는 달밤의 달무지개. 이십세기, 이십오세기, 이백오십세기의 날개의 협곡, 아니, 오늘 너와 나의 오늘의 날개의 협곡, 죽음의 무지개의 너와 내 협곡, 나는 죽어도 그 협곡, 황홀한 늪 속에 빠지고 싶다. 너의 맨발, 너의 낮잠, 너의 안개, 너의 이슬, 아니, 너의 그 포기, 너의 그 획득, 너의 그 황홀에 사로잡히고 싶다. 아, 죽어도 좋은 무지개 너의 협곡, 무지개 층층을 맨발로 내가 올라간다. 너의 그 융기, 너의 그 승화, 너의 그 절정, 다만 너와 단둘이의 절정을 지금 올라간다. 그리고 그리고 떨어진다. 천길 낭떠러지, 안개의 협곡으로 떨어진다. 구름의 협곡 허무의 협곡 절망의 협곡으로 떨어진다. 복숭아여, 털복숭아여, 너 절정의 황홀의 하늘복숭아여. 울음이 강이 되어 너는 울고 있다. 황홀이 절망이 되어 너는 울고 있다, 날개도 속옷도 없이 너는 울고 있다. 발갛게 발갛게 울고 있다.
속 수석열전(續水石列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천부주전(天父主前) 상백시(上白是)
학의 쭉지 꼴짝마다 낭자하옵고
동남 서북 맹수들이 포효하옵고
아직 아직 당신 음성 안 들리옵고
침묵들이 보는 앞에 죽어가는 자유
뻗어도 닿지 않는 꿈의 날개 끝
갈대는 비수 고독
응어리 안에 끓어 별이 되옵고
별이 되옵고.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3
박두진 시인 / 천태산(天台山) 상대(上臺)
먼 항하사 영겁을 바람 부는 별과 별의 흔들림 그 빛이 어려 산드랗게 화석하는 절벽 무너지는 꽃의 사태 별의 사태 눈부신, 아 하도 홀로 어느날에 심심하시어 하늘 보좌 잠시 떠나 납시었던 자리. 한나절 내 당신 홀로 노니시던 자리.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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