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시인 / 반딧불
단념은 미덕이다 ―루낭
보아라, 저기! 아―니 또 여기!
가마득한 저문 바다 등대와 같이 짙어 가는 밤하늘에 별 낱과 같이 켜졌다 꺼졌다 깜작이는 반딧불!
아 철없이 뒤따라 잡으려 마라 장미꽃 향내와 함께 듣기만 하여라 아낙네의 예쁨과 함께 맞기만 하여라.
신가정, 1933. 7
이상화 시인 / 방문 거절
아 내 맘의 잠근 문을 두드리는 이여, 네가 누구? 이 어둔 밤에 `영예!' 방두깨 살자는 영예여! 너거든 오지 말아라 나는 네게서 오직 가엾은 선웃음을 볼 뿐이로다.
아 벙어리 입으로 문만 두드리는 이여, 너는 누구? 이 어둔 밤에 `생명!' 도깨비 노래하자는 목숨아, 너는 돌아가거라, 네가 주는 것 다만 내 가슴을 썩인 곰팡이뿐일러라.
아 아직도 문을 두드리는 이여―이 어둔 밤에 `애련!' 불놀이하자는 사랑아, 너거든 와서 낚아 가거라 내겐 너 줄, 오직 네 병든 몸 속에 누울 넋뿐이로다.
월간 『開闢(개벽)』 1924. 12
이상화 시인 / 본능의 노래
밤새도록, 하늘의 꽃밭이, 세상으로 옵시사 비는 입에서나, 날삯에 팔려, 과년해진 몸을 모시는 흙마루에서나 앓는 이의 조으는 숨결에서나, 다시는, 모든 것을 시들프게 아는, 늙은 마음 위에서나, 어디서, 언제일는지, 사람의 가슴에, 뛰놀던 가락이, 너무나 고달파지면 `목숨은 가엾은, 부림꾼이라' 곱게도 살찌게, 쓰담아 주려 입으론 하품이 흐르더니―이는 신령의 풍류이어라 몸에선 기지개가 켜이더니―이는 신령의 춤이어라.
이 풍류의 소리가, 네 입에서, 사라지기 전, 이 춤의 발자욱이, 네 몸에서, 떠나기 전, (그때는 가벼운 옴자리를 긁음보다도, 밤마다 꿈만 꾸던 두 입술이 비로소 맞붙는 그때일러라) 그때의 네 눈엔, 간악한 것이 없고 죄로운 생각은, 네 맘을 밟지 못하도다―, 아, 만 입을 내가, 가진 듯, 거룩한 이동안을, 나는 기리노라, 때마다, 흘겨보고, 꿈에도 싸우던 넋과 몸이, 어우러지는 때다, 나는, 무덤 속에 가서도, 이같이 거룩한 때에 살고자 하려노라.
시대일보, 1926. 1. 4
이상화 시인 / 비 갠 아침
밤이 새도록 퍼붓던 그 비도 그치고 동편 하늘이 이제야 불그레하다 기다리는 듯 고요한 이 땅 위로 해는 점잖게 돋아 오른다
눈부시는 이 땅 아름다운 이 땅 내야 세상이 너무도 밝고 깨끗해서 발을 내밀기가 황송만 하다
해는 모든 것에게 젖을 주었나 보다 동무여 보아라 우리의 앞뒤로 있는 모든 것이 햇살의 가닥―가닥을 잡고 빨지 않느냐.
이런 기쁨이 또 있으랴 이런 좋은 일이 또 있으랴 이 땅은 사랑뭉텅이 같구나 아 오늘의 우리 목숨은 복스러워도 보인다.
월간 『開闢(개벽)』 192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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